마 실
마 실
  • 장은겸 청주시 서원보건소 하석보건진료소장
  • 승인 2023.01.11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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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장은겸 청주시 서원보건소 하석보건진료소장
장은겸 청주시 서원보건소 하석보건진료소장

 

열 가구가 모여 사는 마을에 우리 집이 제일 먼저 텔레비전을 샀다. 텔레비전이 들어오던 날부터 자정이 되어 애국가 소리가 날 때까지 우리 집은 동네 사랑방이 되었다. 구경꾼들이 방에 다 들어올 수 없어서 문지방 너머 마루까지 사람들이 있었고 여름에는 모깃불을 놓기도 했다.

초저녁 어린이 프로 때에는 아이들이 북적였고, 슈퍼우먼이나 9시 뉴스, 수사반장, 전원일기 시간이면 동네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주말의 명화나 늦은 시간에는 오빠 언니들 아랫집에 사는 성순이 언니가 마지막 손님이었다. 언니는 정신이 조금은 온전하지 않아 못 오게 해도 막무가내였다. 달랑 방 하나에 사랑방이 전부인 우리 집은 매일 축제장이었다.

사랑방에는 겨우내 먹을 고구마 퉁가리를 해놓아서 정말 사람이 눕기도 불편할 만큼 작았다. 어른들이 가득찬 방을 피해 또래 친구들이랑 사랑방에서 윷놀이도 하고 바둑알로 오목 게임도 했다.

안방을 보고 있노라면 포개 누운 사람들, 자는 사람들, 벽에 기댄 사람들, 마루에 앉아 있는 사람, 이미 발 디딜 틈이 없는데도 자꾸자꾸 사람들로 채워졌다.

그뿐인가. 텔레비전 보러 오실 때면 강냉이 튀밥이나 찰밥, 만두, 식혜 등이 차려졌다.

요즘 극장에서 팝콘에 음료 마시듯이 아마도 우리 집 풍경이 원조였지 싶다. 코미디 프로를 하는 시간이면 잔칫집 저리 가라할 정도로 웃음소리가 떠나질 않았다. 하지만 늘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가끔은 레슬링을 보며 응원하다가 싸움이 벌어지고 큰소리가 나기도 했다. 그럴 때면 도대체 텔레비전을 왜 그리 일찍 사서 이 사단을 만들었냐면서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화를 내셨다. 하지만 난 동네 사람들이 와서 북적이는 게 좋았고 함께 먹던 간식들이 정말 맛있었다.

어린 시절 우리 집에 있는 텔레비전 때문에 나는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나랑 친해야지만 놀러 올 수 있었으니 말이다. 친구들이 미처 보지 못한 연속극 이야기를 해주기도 하며 뽐낼 수 있어 좋았다. 내 곁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모여들었고 맛난 쫀드기며 하드 같은 걸 먹을 수 있었다.

요즘에야 나홀로 사는 사람들이 많고 앞집에 누가 사는지조차 모르고 살지만 그 시절에는 아랫집 성례네 집 밥그릇 개수까지 알 정도였다. 대문이 필요 없었던 밤이건 낮이건 드나들 수 있었던 내가 살던 동네가 그립다.

나홀로 살고 나홀로 유튜브를 보고 함께 식당에 가도 나홀로 폰을 만지고 사는 세상이다.

두 딸이 독립을 선언하고 떠난 자리 홀로 밥상 앞에 앉고 텔레비전을 마주할 때 참 외롭게 느껴진다. 그 시절 방 가득 모여 왁자지껄하게 떠들던 모습이 자꾸만 생각이 난다.

윗집 아이가 뛰어다니는지 쿵쿵 소리가 참 요란하다. 층간 소음으로 험한 말들을 하고 사는 세상이라지만 난 이 쿵쿵 소리가 왜 그리 반갑던지. 심심할 때 만들어 놓은 수세미랑 농사지은 땅콩을 들고 올라갔다. 그 소란함에 잠시라도 동참하고 싶어서였다. 베트남에서 시집왔다는 아이 엄마가 문을 연다. 한국말이 서툴긴 했지만 반겨주셔서 커피를 마시고 내려왔다. 잠시 후에 시골에서 시어머니가 보내주셨다며 사과를 가지고 왔다. 서로 자주 왕래하자며 차도 마시고 이야기도 나누자는 약속도 했다.

나홀로의 공백을 이웃과 나눌 수 있길 간절히 원한다. 마실 갈 이웃이 생겨서 너무나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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