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한 남자(2)
심심한 남자(2)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9.12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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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목련
김 혜 식(수필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사랑'이란 도대체 그 젖줄이 어디일까.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아마도 사랑은 중세와 근대에 걸쳐 유럽에서 형성된 로맨스 문학이 그 원류가 아닐까 싶다. 그 낭만적 사랑은 단순히 암컷과 수컷의 '짝짓기'와는 다른 것이리라. 즉 사랑에 정신이 개입되기에 사랑이 목숨과도 맞바꿀 만큼 소중한 것으로 자리해 왔다. 굳이 '로미오와 줄리엣'의 처절한 사랑을 들추지 않아도 그 '관념'이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급격한 산업화에 기인된 우리들의 메마른 가슴 탓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인가. 에리히 프롬 같은 학자들은 낭만적 사랑이 서구 자본주의의 산물이며 그래서 실체가 없는 환상이라고 주장하였다. 물론 사랑은 냄새도, 형체도, 무게도 없다. 눈에서 눈으로 전해지고 가슴에서 가슴으로 피어오른다. 그것이 피어내는 음색은 어느 명장(明匠)의 악기보다 곱고 감미로워 그 선율에 혹한 자는 사랑에 눈이 멀고 마는 것이다.

나도 한때는 정신을 혼절할 정도로 격렬한 사랑의 감정을 느낀 적이 있다.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는 그 사람의 음성만 들어도 가슴이 뛰었다. 그가 보내온 편지만 가슴에 품어도 온몸에 전율이 오는 그런 사랑이었다.

그런 사랑의 힘은 틈만 나면 나를 그 사람 곁으로 달리게 했다. 단 몇 시간이라도 그 사람 곁에서 같이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땐 불어오는 바람결마저도 그것에서 향기가 나는 듯 느껴졌다. 모든 게 신비롭고 가슴 설렜??

그이도 내가 보고 싶어 하루가 멀다않고 날 찾아 서울행이 잦았다. 그 시절의 심정이라면 살점이라도 서로에게 베어줘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흐르는 세월은 그 애틋한 사랑의 감정을 내 맘속에서 조금씩 마모시켰고 희석시키는데 공헌을 했다. 주말 부부이다보니 이젠 남편이 집에 와 숭늉 끓여 달라. 술안주 만들어 달라 주문하는 것조차 어느 땐 귀찮다. 그동안 혼자 생활하는데 익숙해진 탓일까.

연애 시절엔 내 모든 것을 더 못 줘서 안달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남편은 달랐다. 동갑인 우리 부부를 보고 딸아이들이 엄마보다 아버지가 더 젊다고 제 아버지를 추켜세운다. 그러자 남편은 아이들 말에 정색을 한다. 내 나이가 아직도 사십 대 중반으로 밖에 안보여 자신보다 내가 더 젊어 보인다고 한다.

남편의 그 말이 왠지 싫지만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집안에만 있으면 싱거운 사람이 된다. 자식들 앞에서 아내인 나를 칭찬하기 바쁘다. 딸아이들보고 걸핏하면 네 엄마 음식 솜씨를 본받으라고 이른다. 시집가서도 나를 본받아 장도 담그고 김치도 직접 담가 먹으라고 말한다.

어느 땐 시집 식구들 앞에서도 아내 칭찬에 입안에 침이 마른다. 예로부터 아내 자랑 자식 자랑은 팔불출이라 했건만 입만 열면 그 사람은 내 칭찬뿐이다.

어디 그뿐이랴. 단둘이 외출이라도 나서면 자동차 안에서 내 손을 꼭 잡고 운전을 한다. 집에 오는 날이면 아이들 앞에서 민망하게도 내 두 볼에 입맞춤을 한다. 참으로 싱거운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남편의 행동을 친구들한테 말하면 날보고 행복한 여자란다. 결혼하여 수십년 살다 보면 각방 쓰는 것은 다반사이고 서로 남 보듯 하는 부부가 흔하다고 했다. 더구나 젊은 날 아내를 힘들게 한 남편들일 수록 집안에서 그 위치를 잃고 지내기 예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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