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목(木)
나목(木)
  • 김영기 전 충북교육과학연구원장
  • 승인 2022.12.28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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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들려주는 과학 이야기
김영기 전 충북교육과학연구원장
김영기 전 충북교육과학연구원장

 

거친 숨소리가 들린다. 잎은 뿌리에서 올라오는 수액을 공급받고 자란다. 여름이면 관다발의 젖줄을 이어가고 비 오는 날엔 흔들리며 춤춘다. 뜨거운 햇살이 떨어지고 비바람이 몰아쳐도 쉴 틈 없이 일하고 호흡한다. 빛의 노래를 부르는 생명의 싱그러움은 우리를 늘 행복하게 한다.

앙상한 나뭇가지마다 눈꽃이 피었다. 잎자루의 떨켜는 만남의 기쁨과 이별의 아픔들을 무심히 떨어뜨린다. 추운 겨울 시련을 견디려면 자신의 몸을 최소한으로 가볍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떨켜는 나뭇가지와 잎자루 사이에 생긴 세포층이다. 윤슬처럼 빛나던 잎들을 보낸 들판에는 황량한 바람이 불고 적막하게 홀로서 있는 나목엔 침묵만 흐른다. 보금자리를 만들었던 숲 속에는 새들마저 모두 떠나 버렸다. 지난 세월을 견디어낸 나무껍질에 인고의 두툼한 골을 만들고 거북등처럼 굳어진 껍질에는 땀방울이 말랐다.

하늬바람이 불어오는 날 나목은 겨울나기에 방해가 되는 마지막 남은 잎마저 떠나보내고 눈보라를 맞을 준비를 한다. 기온이 떨어지면 줄기나 뿌리에 비축해두었던 고분자물질을 조금씩 녹여낸다. 나무의 세포에는 수크로오스 같은 당분이나 프롤린, 베타인 같은 아미노산을 증가시킨다. 이 물질들이 바로`항 결빙(抗結氷)'이다. 어는점을 낮추며 얼음 핵이 생기는 것을 막아준다.

빙판을 만들고 살바람이 부는 겨울에 피층의 얇은 옷을 입고 추위를 견디는 생명의 신비는 놀랍다. 나목은 떨켜의 매듭에 도드라진 상처를 어루만지며 겨울눈을 숨겨두고 있다. 진하고 굵은 나이테가 짙게 주름 잡히는 날이다.

수백 년을 살아온 고목은 나라의 흥망성쇠를 지켜보며 칼바람도 이겨냈다. 긴 세월동안 몸통은 텅 빈 채 가지들의 버팀목이 되느라 굽은 허리를 펴지 못하고 서 있다. 마치 자식을 위해 모든 걸 내어주는 부모 마음처럼 최후의 순간까지 잎을 내려고 안간힘을 쏟고 있다.

나목의 빈 나뭇가지 숲을 지날 때면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며 사색에 잠기게 한다. 무거운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다음 세상을 꿋꿋이 기다리는 모습은 작은 어려움에도 당황하며 동동거리는 빈약한 나의 삶을 부끄럽게 한다. 내 속에는 떨켜 세포층이 성장하지 못해, 떠날 때가 다된 세상의 마른 잎들을 붙들고 힘들어하는 모습이 있다. 세상 풍파를 견디며 살아왔기에 모든 짐을 내려놓고 홀가분한 몸으로 서 있어야 함에도 부질없는 것들을 붙잡고 있다.

태어날 때는 순서가 있지만 세상을 떠나갈 때는 순서가 없다. 흘러간 세월을 탓해서 무엇하겠냐마는 무정한 세월을 멈출 수 없다.

삶이 외롭고 힘겨워도 봄은 어김없이 돌아온다. 외로움이 아무리 지독해도 황량한 들판에서 얼음이 녹기를 기다리며 흙덩이가 따스해지기를 나목은 묵묵히 기다려야 하리라. 만남의 기쁨도 이별의 아픔도 세월의 한순간 일만 겁의 정점일 뿐이다. 온몸을 움츠리게 하는 북풍과 살을 에는 슬픔이 지나면 고요한 아침 해가 새 세상을 보게 할 것이다. 잠깐 소풍 나와 땅에 떨어진 낙엽들과 추억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나목의 든든함 일지도 모른다. 저 강을 건너기 전에 익어가는 삶의 여정을 도란도란 누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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