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달 그믐 밤
섣달 그믐 밤
  •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 승인 2022.12.26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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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 이야기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정월 초하루가 엊그제 같은데, 또 섣달 그믐이 코앞에 와 있다. 한 해가 지나갈 때 사람들은 세월의 무상함을 절감하면서 쓸쓸한 기분이 되게 마련이다.

더구나 섣달 그믐은 겨울의 한복판이라서 몹시 춥기까지 하다.

추위가 심한 북쪽 땅 타지에서 홀로 맞는 섣달 그믐 밤은 쓸쓸함 그 자체일 것이다.

명(明)의 시인 우겸(于謙)은 추위가 심한 태원(太原)이라는 곳에서 가족과 떨어진 채 섣달 그믐 밤을 맞는 신세가 되었다.


섣달 그믐 밤(除夜太原寒甚)

寄語天涯客(기어천애객) 천애의 나그네인 그대에게 보내노니
輕寒底用愁(경한저용수) 추위는 별거 아니니 어찌 근심하는가?
春風來不遠(춘풍래불원) 머지않은 곳까지 봄바람이 당도해 있으니
只在屋東頭(지재옥동두) 다만 집의 동쪽 머리에 와 있을 뿐이라네


겨울의 한복판이자 추위가 극성을 부리는 섣달 그믐 밤은 극적인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다.

한 해의 마지막 달이자 마지막 날이며 마지막 밤이지 않던가? 인위적으로 만든 시간의 구획이긴 하지만, 사람들은 이 특별한 시간대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시인은 먼 변두리 타지에서 섣달 그믐 밤을 맞고 있을 친구를 떠올리며 짐짓 위로의 글을 써서 부친다.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 하늘 절벽 곧 천애(天涯)이다. 그런 곳에서 홀로 한 해 중 가장 외로운 시간을 맞는 친구에게 위로의 말을 찾는 시인의 마음은 따뜻하기만 하다.

시인은 친구에게 살을 에는 추위 따위는 별거 아니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시인이 이렇게 판단하는 근거는 삶의 경험에서 얻어진 것이다.

그것을 시적 언어로 바꾸어 표현한 것뿐이다. 봄바람을 의인화해서 마치 먼 데서부터 오는 손님으로 말한다.

그 손님이 오면 곧 추위가 가고 봄이 오는 것인데, 그분이 지금 거의 다 왔다고 실의에 빠진 친구에게 귀띔을 해준다.

아직 집에 들어오진 않았지만, 집 밖 동쪽 모퉁이를 돌고 있으니 오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것이다. 과장이겠지만 먼 곳에서 섣달 그믐 밤이라는 가장 춥고 외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시인의 친구에게는 이만한 위로가 다시 없을 것이다.

밤이 깊을수록 새벽은 가까운 법이다. 혹독한 겨울 추위도 마찬가지이다.

겨울이 깊어 추위가 극에 달하면, 사람들은 더 추워질까 봐 걱정이 태산이지만, 경험 많은 어르신은 추위가 곧 지나갈 것임을 알기에 도리어 안도한다.

먼 타지에서 춥고 외로운 섣달 그믐 밤을 보내는 친구에게 부치는 위로의 글은 그 내용도 내용이지만, 정작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은 글을 쓴 이의 마음 아니겠는가?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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