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을 펼치며
우산을 펼치며
  • 한기연 시인
  • 승인 2022.12.22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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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한기연 시인
한기연 시인

 

눈이 내린다. 예전의 감성은 사라지고 함박눈을 맞지 않으려고 지인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우산을 쓴다. 작은 공간이지만 눈을 피할 수 있어서 고마울뿐이다.

12월 들어 신발장 한쪽에 수납된 우산을 들고 외출하는 일이 잦아졌다. 여름에는 비를 막아주고, 때로는 햇빛을 가리던 것이 겨울까지 쓸모 있게 쓰이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많던 우산이 이제 몇 개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비가 왔다가 그치면 우산을 챙기지 못하고 돌아오는 탓이다. 누구에게나 가장 잃어버리기 쉬운 물건이라더니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단 한 개의 우산만 빼고는 갖고 나간 사실을 잊어버린다.

5년 전 두 아들과 스페인과 포르투갈로 지인들과 여행을 갔다. 여행을 간 것도 좋았지만 두 아들과 함께여서 더욱 즐겁고 행복했다. 여행지 한 곳에서 거리에서 파는 우산을 선물 받았다. 여행경비는 모두 내가 냈지만, 그 우산값은 두 아들이 냈다. 여행지 그림이 그려진 값싼 우산이었지만, 말 한마디에 보물로 변해버렸다. 그 어떤 비바람도 막아줄 거라며 `엄마를 지켜주는 수호신이야' 하는 말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얼마 전, 갑자기 돈이 필요해졌다. 상가주택을 지으면서 은행에서 이미 대출을 받은 상태라 난감했다. 만기가 얼마 남지 않은 적금을 해약해야 하는지 이리저리 궁리하다가 불현듯 `노란 우산'이 떠올랐다. 몇 년 전에 우연히 알게 돼서 사업자를 위한 소득공제도 되고, 퇴직금 마련한다는 생각으로 낸 것이 목돈이 되었다. 콜센터에 상담해보니 납부한 금액 내에서 저금리로 대출 가능하며 당일 바로 입금이 된다고 한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노란 우산이 화면 가득 펼쳐진 광고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최초의 우산은 오늘날 이라크에 속하는 아카드에서 기원전 2334년부터 2279년 무렵 사르곤 왕 시기에 발명되었다. 그의 승전비에는 전쟁터로 나가는 왕의 머리 위에 시종이 커다란 우산을 씌워 주는 장면이 새겨져 있다. 우산은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왕의 권위를 뜻하는 물건이었다. 뙤약볕으로부터 군주를 보호하는 것이기도 했으며 왕 위로 뻗은 하늘이기도 했다. 천주교에서는 교황의 머리 위를 우산으로 덮었으며, 중국에서는 우주의 상징이었다. 고대 아시리아나 이집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6세기경 우산이 발명되는데 놀랍게도 오늘날의 우산처럼 접고 펼 수 있는 금속제였다.

비가 오는 날 들고 나갔다가 너무나도 쉽게 잃어버리는 우산은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그 기본 형태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고 한다. 초고속으로 변하는 시대에 걸맞게 하루에도 많은 새로운 것들이 쏟아지고 변하거나 없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4천 년 전에도 사용하던 비슷한 방식으로 기본 형태가 변하지 않고 사용되는 물건이 우산이다. 변함없이 본질을 지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산'이라는 작은 물건을 보면서 사고의 깊이가 깊어진 까닭을 짚어 본다. 나를 지탱해 주는 소신 하나는 변함없이 지키고 싶은 마음과 보호의 공간이 필요해 보인다.

젊었을 때는 친구들과 맨발로 두 손에 신발 들고 빗소리보다 더 시끄럽게 길을 걸었다. 겨울에는 눈 쌓인 중간쯤에 서서 함박눈을 맞아도 두렵지 않았다. 나이가 들수록 세월의 무게를 견디기 힘든 탓일까? 자꾸만 빈 구석으로 바람이 스민다. 물건으로써의 우산을 챙기는 버릇도 생겼고, 변함없이 지켜줄 누군가의 손길이 더욱 그리워진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쉽게 그칠 눈이 아니다. 펼쳐진 우산 위로 눈이 사르르 녹아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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