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일시호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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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지연 한국교원대 초등교육과 교수
  • 승인 2022.12.21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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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현장
최지연 한국교원대 초등교육과 교수
최지연 한국교원대 초등교육과 교수

 

살림살이를 등에 지고 걸어야 하는 도보여행에서 배낭 무게 줄이기는 핵심 중의 핵심이다. 전문가들은 몸무게의 10% 이내로 가방 무게를 제한할 것을 권한다. 몸무게가 60킬로그램인 성인은 6킬로그램 이내로 꾸려야 가방의 짓눌림으로부터 그나마 자유로울 수 있다. 몇 년 전 떠난 첫 도보여행에서 출발 당시 꾸린 배낭 무게는 13.5 킬로그램, 제한 무게를 두 배 이상 초과하였었다. 물론 출발 후 열흘 이내에 3킬로그램 정도를 처분했다. 살려면 그래야 했다. 하지만 매일 마실 물과 샌드위치를 담고 나면 여전히 12킬로그램을 육박했다. 다행히 무게는 곧 익숙해졌다. 혹 배낭을 부려놓고 맨몸으로 걸을라치면 몸이 붕붕 떠다니는 것 같아서 불편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운동할 때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무거운 역기를 들고 데드리프트나 스쿼트를 하다가 내려놓으면 순간 몸이 날아갈 듯 가볍다. 무거웠던 몸은 오간 데 없고, 더 무거운 역기로부터 놓여나니 얼마나 자유로운지, 마음 참 간사하다.

다도에는`무거운 것은 가볍게, 가벼운 것은 무겁게 들라'는 말이 있다. 무거운 물동이는 가뿐하고 산뜻하게 들고, 가벼운 찻잔은 묵직하고도 진중하게 든다.

매주 찻자리로 모일 적의 일이다. 다도 모임을 이끄는 선생님의 찻자리 준비는 빈틈이 없었다. 물의 기운을 북돋고자 자정 무렵 물을 길어 항아리에 담고 하루를 묵혀둔다. 불순물이 가라앉으면 윗물만 가만히 떠서 찻물을 끓였다. 전기 주전자에 후루룩 끓이는 물은 온전치 않다고 시간이 걸려도 불이 지펴 물을 끓였다. 차는 또 어떤가? 참새 혀 같은 작은 잎들을 손으로 일일이 따서 아홉 번을 덖어 다실까지 당도한 차다. 그 차를 마실 만큼씩만 덜어 또한번 슬쩍 덖는다. 한 김을 내어 보낸 후 차호에 담아 찻자리에 낸다. 물이 차보다 무거운가? 차가 물보다 중한가? 물이나 차나 가볍지 않기는 매일반이다.

무거운 물동이에 아등바등하다 넘어지거나 차호 속의 차를 덜다 엎지르는 일이 찻자리에선 종종 생긴다. 무겁다고 무게에만 집중하면 물건의 무게에 눌려 내 중심을 잃게 된다. 또 가볍다고 소홀하면 그 물건이 중심을 잃게 된다. 그러니 무거운 것은 가볍게, 가벼운 것은 무겁게 들어야 한다. 그러고 나면 무거운 것에도, 가벼운 것에도 중심을 잃지 않아 매사 균형 잡히고 조화로운 몸가짐을 지니게 된다. 차 생활의 형식이 몸에 밴 사람들이 차를 우릴 때 그 몸짓이 느리지도 급하지도,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또 연말을 마주 대한다. 어떤 이는 시간을 사람이 정해놓은 물리적인 선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공전과 자전의 주기로 빚어낸 이 리듬을 그리만 본다면 너무 가벼이 여기는 것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한 해, 한 해 시간에 급급해하며 사는 것 역시 시간의 무게에 눌려 중심을 잃게 만드는 일이 된다. 하루는 가벼워 경이 여기고, 한 해는 하루가 365번 쌓인 것이니 중히 여기는 것 역시 어리석다. 하루하루의 삶을 자기에게 집중하며 정진하는 것이 가벼운 하루를 무겁게 들어 올리는 것일 테고, 그리 쌓인 한 해의 무게에 짓눌려 좌절하지 않고 내일 주어질 또 하루를 가벼운 마음으로 준비하는 것이 무거운 한해를 가볍게 들어 올리는 것 아닐까?

`日日是好日', 우리말로 하면 날마다 좋은 날. 한 해를 보내며 지난 360여 일을 돌아보니 그래 하루하루 참 좋은 날이었다. 그 하루하루가 쌓여 돌아온 결과는 빈약하고, 성장은커녕 퇴화라는 말이 적합할 만큼 초라한 성적표를 들고 있다고 해도, 거기서 배웠고 돌이키지 않았던가? 무거운 것은 가볍게, 가벼운 것은 무겁게, 우아하고도 중후하게 오늘 하루를 들어 올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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