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리는 너, 내가 그리는 나
내가 그리는 너, 내가 그리는 나
  • 추주연 충북단재교육연수원 교육연구사
  • 승인 2022.12.20 17: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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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추주연 충북단재교육연수원 교육연구사
추주연 충북단재교육연수원 교육연구사

 

연말이어서일까? 연이어 일정이 겹친다. 출장 업무를 마치고 워크숍에 합류하기 위해 서둘러 이동하는 마음이 조급하다. 무리를 한 탓인지 운전하는 내내 눈두덩이가 천근만근 무겁다. 신호등 빨간불에 잠시 차가 멈춘 틈을 타 룸 미러에 비춰 보자 오른쪽 눈이 염증으로 부풀어 올라 벌겋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하는 워크숍에 참여해야 하는데 여간 낭패가 아니다. 밤늦은 시간 문을 연 약국이 드물어 한참을 헤매다 간신히 약을 구해왔다.

엄지손톱만큼 굵어 목 넘김 고약한 알약들은 꼬박꼬박 챙겨먹었는데도 눈은 점점 더 부풀어 오른다. 사람들 앞에 나서야하는 상황이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부은 눈두덩이를 사람들이 어찌 볼까, 보면서 불편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다. 묻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이러니 저러니 구구한 사연을 변명처럼 늘어놓는다.

부어오른 눈 때문에 운전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꼭 보고 싶었던 전시회가 열리는 갤러리를 찾았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다운증후군 영희 역을 맡아 열연했던 정은혜 작가의 개인전이다. 정은혜는 2016년 데뷔한 7년 차 작가로 이번 전시회 `내가 그리는 너'에서 40여 점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발달장애를 지닌 정은혜 작가는 2016년 어머니의 미술학원에서 청소를 맡아 하다가 불현듯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화폭에 옮겨 선물했다고 한다. 가까운 이들의 얼굴로 시작된 정은혜 작가의 작업은 양평 문호리에서 개최되는 `리버마켓'에 캐리커처 작가로 참여하면서 낯선 이들의 얼굴로 확장되었다.

정은혜 작가에게 그림은 타인과 함께 살아갈 수 있게 한 소통의 창구다. 사람들과 소통을 어려워하며 집에서 뜨개질에만 열중하던 정은혜 작가는 그림을 통해 더 넓은 세상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그림으로 소통하면서 작가의 시선 강박증이 없어졌고 말 더듬과 이 갈이도 사라졌다고 한다. 그림을 그리고 선물하는 과정은 작가와 모델이 된 사람들 모두에게 치유의 시간을 만들어 주었고 정은혜 작가가 그리는 `너'들이 계속해서 늘어 수천 명의 얼굴이 작품으로 탄생했다.

정은혜 작가는 자유분방한 표현과 간결하고 힘찬 선, 대담한 색채를 통해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만들어 낸다. 무엇보다 일상의 시간이 얼마나 특별한 순간인지 기억하게 한다. 작가가 그려낸 것은 종이 위에 그려진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미소와 행복이었다. 갤러리 한쪽에는 누구나 `내가 그리는 너'를 그릴 수 있도록 드로잉 존이 마련되어 있고 작가의 그림과 사람들의 그림이 함께 붙어 있다. 갤러리를 찾은 사람들의 눈에 담긴 `너'들이 아름답다. `너'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아름답다. 문득 지금 내 시선은 어디에 머무르고 있는지, 우리의 시선이 필요한 곳은 어디인지를 떠올리자 서늘했던 마음 속에 온기가 돈다.

염증으로 부풀어 올랐던 오른쪽 눈이 좀 가라앉으니 이번엔 왼쪽 눈마저 벌겋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다. 더 이상 부풀어 오른 눈을 부끄러워하거나 숨기지 않고 올 한해 최선을 다해 살아온 나를 보살피라는 전령으로 맞이하기로 했다. 나의 따뜻한 시선이 필요한 것은 누구보다 나 자신일지 모른다. 내 눈에 정은혜 작가 최고의 작품은 `내가 그리는 나'이다. 누군가와 포옹하고 있는 자기 모습을 그린 자화상 옆 붉은 벽에 하얀색 글씨로 씌여있는 정은혜 작가의 글귀가 눈처럼 소담하다. “얼굴 그리는게 좋아요. 사람들은 다 다르니까. 다 예쁘고 멋있고 자랑스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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