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비밀
나무의 비밀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22.12.14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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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꽃숲. 한숨 멎는, 그 황홀함에 갇혔다. 추운 날에 도도히 꽃을 피운 붉은 동백을 본 바람이 쌀쌀맞다. 나무 위의 꽃에, 땅 위의 꽃잎 위에 서슬 퍼런 날을 세운다. 슬쩍 일으킨 질투에 꽃잎의 춤사위가 곱다. 호접지몽(胡蝶之夢). 꽃이 나인가. 내가 꽃이런가.

나무나 꽃은 하나가 아닌 여럿이 모여서 숲이 된다. 서로 키를 다투며 울창한 숲을 만드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나의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나무를 보았다. 혼자서 기세등등하게 숲을 만드는 나무가 있다. 넓은 공원 전체를 덮은 나무는 폭군처럼 보이는 게 위세가 대단해 보인다.

영상은 미국의 라하이나 반얀트리공원을 비춘다. 빽빽이 신록으로 무성하다. 노인의 긴 수염 같기도 하고 커튼을 친듯한 모습이다. 점점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실의 실체가 뿌리라는 설명에 놀랐다.

이 나무는 뿌리가 땅에 닿으면 힘껏 흙을 움켜쥔다. 사력을 다해 그곳에 뿌리를 박고 자라면서 기둥을 세운다. 수많은 뿌리들이 가지에서 땅으로 내려와 뿌리가 되고 다시 뿌리는 새로운 가지가 된다고 한다. 스스로 옆으로 뿌리를 내려가며 자신의 몸집을 키운다. 주위의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모두 고사시키고 만다. 이렇게 계속 커가기 때문에 거대한 나무가 된다. 다른 나무들에겐 폭군인 셈이다. 무시무시한 귀신나무라는 별칭이 붙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나무 아래에서는 벤치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이 보인다.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는 아이들도 눈에 띈다. 어른들의 쉼터가 되고 아이들의 놀이터가 된다. 공원을 그늘로 덮는 숲은 오롯이 한 그루의 나무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인도의 대표적인 수목으로 황무지의 땅에서 살아남기란 녹록하지 않았을 터. 척박한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해 지혜가 필요했을 것이다. 한 나무가 커서 뻗어 나온 가지가 다시 땅으로 내려와 무거워진 가지를 지탱해주는 지주대가 된 것이리라. 한 몸에서 수천 개의 뿌리가 나오고 다시 그것을 줄기로 삼아 거대하게 자란 나무의 숲은 공원이 된 것이다.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생존법이었다. 쓰러지지 않고 버티기 위해, 땅 위에서의 균형을 위해 온몸으로 떠받치려는 발버둥이 악명을 얻게 되어 억울할 것 같다. 심술 궂어서도 아닌, 욕심이 많아서도 아닌데 말이다. 약한 뿌리로 바람에 흔들리지 않기 위한 나무의 몸부림이 느껴지는 듯하다. 처절했을 나무의 인내가 아프게 와 닿는다. 반얀나무의 깊은 속성을 알고 나니 미안해진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섬뜩하다고 했으니 나의 마음 수양은 아직 멀었나 보다.

나무로 향하던 마음이 다시 사람에게로 건너간다. 억척스러운 그녀는 사납기까지 했다. 한 번 맺은 인연을 끊기 싫어 이어온 만남이었다. 독불장군 인양 고집만 센 그녀를 만날 때마다 내가 상처를 받았다. 아프면서까지 굳이 이런 사람을 만나야 하는지 회의가 왔다. 유쾌하고 좋은 사람을 만나도 짧은 인생이라는 결론을 내린 날로부터 그녀를 멀리했다. 그 후로 서로 데면데면한 사이가 되었다.

홀로 아이들을 키우고 살기엔 만만치 않은 세상이다. 반얀나무가 그렇듯 환경이 그리 만들었을진대 몰라주는 내가 오죽 서운했을까. 처음부터 모질게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누가 야리야리한 여자로 살고 싶지 않을까. 말로서 독을 뿜어댄 내가 독한 사람이었다. 나무를 통해 그녀를 알아간다.

사람들은 누구나 아픔을 들키고 싶지 않을 때 자신만의 숲에 숨는다. 그녀가 들어가는 마음의 숲. 오늘은 거기에 내가 있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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