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이런 반전은 없었다
지금까지 이런 반전은 없었다
  •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 승인 2022.12.11 19: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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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새삼스레 흥미로운 프로그램을 발견했다. 이젠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해도 되는 `사랑과 전쟁'이다. 치정과 재산싸움 등 말도 안 되지만 주변에 있을법한 이야기를 소재로 사람의 깊은 본능을 자극하고 욕망과 이성 사이에서 정신 못 차리게 하는 은근한 재미가 있다. 인간의 속물근성을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우리의 관음증을 풀어준다. 특히 비급(?) 연기자들의 연기 모음이 짤로 돌아다닐 정도니 여러 면에 실사구시형 프로그램이다. 인생사의 필요한 욕망의 솔루션과 몹쓸(?) 교훈을 주기도 한다.

나이 드니 왜 이런 자극적이고 닭살이 돋아나는 드라마를 보며 혼자 낄낄거리는 건지. 나 역시 뻔한 사람 임을, 장삼이사(張三李四)에 불과한 삶임을 깨닫고 스스로 낮아지곤 한다.

어떤 경로로 구입했는지 알 수 없지만 책장을 두리번거리다 발견한 작품의 제목『수상한 여우 씨』에서 느껴지는 향기가 `사랑과 전쟁' 버전 같아 초반에 밑밥을 깔아본다. 무턱대고 골라온 나의 호기심도 발칙하다고 생각하며. 한눈에 보기에도 세상 천진난만한 병아리 아가씨가 혼자 나뭇가지에 앉아 콧노래를 부르다 여우에게 낚이고 마는 장면이 펼쳐진다. 마치 행운을 만난 듯이 여우의 차에 날름 올라타는 병아리, 서로 딴생각으로 들떠 있다. 병아리는 멋진 나들이가 될 것을 예감하고 여우는 맛있는 영계백숙을 생각한다. `백치 같은 병아리에게 찾아온 여우!' 불안한 마음을 누르고 반전 스토리를 기대하며 책장을 넘긴다.

병아리에게 친절을 베풀며 이것저것 알려주고 가르쳐주는 여우는 그저 한입에 병아리를 털어 넣을 생각만 하고 있다. 외모를 지적하는 게 못마땅했지만 병아리를 먹을 생각에 이런 지적쯤이야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리고 “여우 씨는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여우”일 거라는 병아리 아가씨의 말에 잠시 흔들린다.

“병아리야, 여우가 병아리를 만나면 무엇을 할 것 같니?”

“음, 제 생각에 여우는 병아리에게 뽀뽀를 할 것 같아요.”

그때, 예상치 못한 반응이 여우에게 일어난다. 여우의 가슴이 허락 없이 뛰기 시작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피론은 절대적인 것은 없으니까 그저 탐구하자고 주장한 바 있다. 여기서 `탐구'는 시도나 개선, 관찰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는 어떤 것도 진실로 그런 것은 없기 때문에 `이것의 본성은 이렇다'라고 말하는 대신에 `그것은 내게 이렇게 보인다' 혹은 `그것은 그러할 것이다'라는 식으로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습지만 피론은 `진리는 없다'라는 진리를 말하고 있다. 함부로 선입견과 편견으로 관계를 직조한 나로서 다른 종(種)의 눈맞음을 이해하기 위해 작품을 다시 읽어야 했다.

병아리 아가씨의 사랑은 판단을 유보하므로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주었다. 그랬기에 위험한 선입견 없이 여우와 교감할 수 있었고 본능에 충실했던 여우의 욕망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사심 없는 사람이 강하다는 것은 경험을 통해 우리는 짐작하고 있다. 이제, 병아리와 여우는 보름달 아래 피크닉을 즐긴다. 떨어지는 별똥별을 보며 속삭이는 사이가 되었다. 여우의 심장은 병아리만을 위해 뛰고 있다.

앞으로 채식을 하게 될 수도 있는 여우와 여우의 본질을 알게 되는 병아리의 다음 스토리가 궁금해지는 것은 다시 반전을 예고하는 납량특집 공포 영화 시리즈 같다. 역시 판단 보류하는 마음으로 여러 가지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본다.

우리의 생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충실했던 한 해를 돌아보며 자아 비판하며 스스로 판단하기보다 다시 자신에게 기회를 주는 것은 어떠하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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