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하지 않기
계산하지 않기
  • 장민정 시인
  • 승인 2022.12.07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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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장민정 시인
장민정 시인

 

내겐 연년생 오빠가 있다,

한 살 터울인 오빠가 재수하는 바람에 오빠 친구가 내 친구 내 친구가 오빠 친구가 되었다.

집이 시골이라서 도시로 유학하는 처지였으므로 고향 집에 있는 시간은 방학 때뿐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는 소원하게 지냈지만, 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1년쯤 쉬었던 적이 있었다. 오빠가 지방대 국문과에 입학한 해 겨울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책을 좋아하는 걸 아는 오빠 친구들 덕에 서점이 없는 시골구석에서도 나는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지금은 다 잊어버려서 무슨 무슨 책인지 모르지만 일 주에 서너 권은 꼬박꼬박 어김없이 구해다 주는 친구도 있었고 신문에 연재되던 신춘문예 소설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잘라서 가져다주는 열성 친구도 있었다.

우리 집은 한 열 칸 집은 되었다. 시골에서는 여유 있는 큰 집이었으므로 사랑채에는 자연스레 오빠의 친구들이 들끓기 마련이었다. 너도나도 못 먹고 못 살던 시절이어서 농한기에는 어른이나 아이나 할 것 없이 빈둥거릴 수밖에 없는 때이기도 해서 넓은 우리 집 사랑방은 그들에게 꽤 요긴한 곳이기도 했다. 더구나 몸이 허약했던 오빠는 장손이기까지 해서 온 집안사람들이 불면 꺼질까 떠받드는 처지여서 사랑채는 아예 동네 사랑방처럼 내놓은 격이랄까, 그런 오빠가 머무는 사랑방에는 날마다 여러 명이 뒹굴고 자곤 했던 기억이 난다.

서툰 기타를 딩동 거리는 소리가 나기도 하고 박인환과 소월의 시를 읊조리는가 하면 윤동주를, 이상을 열을 올리며 떠들곤 하던 그 패거리들은 술도 지겹도록 퍼마셨고,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고 애연가처럼 연기를 뻐끔거리기도 하는 통에 니코틴 냄새가 코를 싸쥐게 하기도 하던 방 아랫목의 이불에는 불똥이 튀어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있곤 했었다.

“오빠, 친구들 좀 오지 말라고 해” 못마땅하다고 불평하는 것은 오직 나뿐이었다. 먼지가 풀풀 날리던 방, 코를 싸쥐고 더럽다고 야단칠 때마다 詩는 그런 곳에서만 써진다며 꽁초들로 넘쳐나는 재떨이마저 비우려 하지 않던 오빠, 깨끗하면 불안해서 詩가 달아난다나 어쩐다나 엄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무튼 돼야지굴(어머니 말씀) 속의 오빠들,

그때, 오빠 친구들은 어떤 연유에선지 <계산하지 말자>고 암암리에 묵계가 된 것 같았다.

있으면 나누고 없으면 굶고, 네 것이 내 것, 내 것은 네 것,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라는 등, 그래선지 우리 집 밥상 앞에도 스스럼없이 끼어 앉던 친구들도 여럿이었다.

가난과 고통을 젊음 속에 섞어서 날마다 괴로운 즐거움 속에 울고 웃던 시절, 자연스레 그 사상은 내게도 주입이 되어서 계산하지 않겠다고 떠들곤 했다. “계산하지 않을래, 느끼며 살고 싶어”

너무 멋있는 말이라고 몸을 떨었다. 사랑도 그렇게 하리라. 처음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든지 아니면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어디서 종소리가 자꾸 울린다든지, 그런다면 나는 물불 안 가리고 사랑에 빠질 거야, 그러고 말 거야,

이렇게 위태로운 생각이 생활과 접목된 내 생활은 면면히 이어져 수학 공부마저 싫어하고 평상시에도 물건 하나 사고 돌아서면 그 값을 깡그리 잊어버리곤 하면서 그런 나를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했다.

이웃의 한 친구는 못 입고 못 먹은 한풀이를 하듯 남편과 함께 밤새도록 궁리에 궁리했다던가? 위턱 빼내어 아래턱 괴는 계산도 밤새는 줄 모르고 늘상 하더니 종국에는 부동산 부자가 되어 떵떵거린다. 그 친구처럼 나도 열심히 주판알만 튕겼더라면 오늘날 내 주소도 달라졌을지 모를 일이다. 해도 후회하지 않는다. 열병을 앓던 순수한 젊음이 나름대로 소중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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