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괴감(自愧感)
자괴감(自愧感)
  •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 승인 2022.11.30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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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룡 명예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어떤 정치인이 자괴감을 때 묻은 조롱의 뉘앙스로 바꾸어 놓고 말았다. 때 묻은 단어의 세탁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사실 자괴감(sense of shame)은 멘탈을 한 단계 더 파기 위한 통로 역할을 한다.

데카르트가 묻는다. 세상에 절대적으로 확실한 지식이 있을까? 외부 세상과의 만남에서 찾을 수 있을까? 외부와의 1차적 통로인 감각 경험은 믿을 수 없다. 500원짜리 동전으로 해를 가리면 가려진다. 곧 감각은 해보다 500원짜리 동전이 크다는 걸 우리에게 알려준다. 믿을 수 없다. 내 앞에 확실히 컴퓨터가 있다고? 어제 밤 꿈에 대통령이 나와서 나하고 씨름을 했는데 한판 메치고 나서 너무 흐뭇했다. 그 때 그 장면이 생생해서 나는 그걸 사실로 느꼈다. 그런데 깨고 나서 보니 꿈이었다. 지금 내 앞에 컴퓨터가 있다는 것도 너무 명백해서 사실일 수밖에 없다고? 그게 꿈이 아니라는 보장이 있을까? 없다. 그럼 그것도 절대적으로 확실하다고 말할 수 없다.

이렇게 모든 걸 의심할 때, 나는 의심하고 있다. 곧 내가 의심하고 있다는 건 의심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의심하고 있는 내가 있다는 건 100% 확실하다. 내가 의심하고 있는 걸 보면 나는 있다(cogito ergo sum). 이게 그 유명한 데카르트의 선언이다.

이 결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첫째, 나와 세계 사이의 관계는 의심스러워서 세계에서 확실한 무언가를 구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나의 의지처는 세상이 아니다. 세상과 내가 단절된다. 둘째, 가장 확실한 의지처는 내 안에서 찾아진다. 모든 걸 의심해도 내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수 없다. 결국 가장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건 나다.

모든 걸 의심해도 결코 의심할 수 없는 이 확실한 느낌이 통용되는 영역이 수학이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경험 독립적인 수학을 진리를 구현하고 있는 학문으로 본다. 데카르트는 나 밖의 세상을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연장체(extended body)로 봄으로써 세계를 수학적으로 계산이 가능하게 만든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이성을 통해 세상의 질서를 낱낱이 규명할 수 있다는 근대적 사유방식의 창시자가 된다. 이성을 가진 인간이 세상의 중심에 서 있다는 이성 중심, 인간중심의 세계관을 창시한 것이다.

데카르트적 사고방식은 영국의 경험주의와 결합하여 근대 과학을 만들어내고 이로부터 과학을 통한 세계정복이 시작된다. 결국 근대과학을 기반으로 하는 서구문명의 바탕에는 모든 걸 의심해도 결코 의심할 수 없는 나를 찾는 과정, 곧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자리하고 있다.

이 자명한 명제에 등장하는 나는 둘이다. 곧 의심하고 있는 나1과 의심하고 있는 나1을 보는 나2가 있다. 의심하고 있는 나1과 구분되는 나2가 근대인이 만들어낸 근대적 자아이다. 나2는 나1과는 다른 지평 위에 있다. 곧 한 차원 높은 수준에 존재한다. 그래서 나1을 깰 수 있는 발상으로는 나2를 깰 수 없다. 근대인들은 이 나2를 절대적으로 깨지지 않는 존재로 승격시킨다. 이것이 그 유명한 헤겔의 절대정신으로 어느 시대나 역사를 거쳐서도 결코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지위를 갖게 된다.

근대인은 자신 안에 절대로 깨지지 않는 나2를 갖고 있다. 그래서 근대인은 당당하다. 스스로 정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괴감은 나2가 붕괴(自壞)될 때 드는 감정이다. 스스로 정당하다고 믿는 생각이 붕괴될 때 드는 느낌이 자괴감이다. 자괴감은 나는 정당한 존재가 아니며 죄책감이나 죄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걸 말하고 있다.

조금 거창하게 말하면 근대적 자아의 당당함에 기초해 있는 근대적 사유, 과학적 지식의 정당성이나 진리성을 붕괴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게 자괴감이다. 그리고 자괴감은 과학적 입증이나 논리적 증명을 넘어서 있는 깊은 진리에 이르기 위한 입구 역할을 한다.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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