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역사는 각도의 차이다
인간의 역사는 각도의 차이다
  • 이영숙 시인
  • 승인 2022.11.27 16: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세상 엿보기
이영숙 시인
이영숙 시인

 

“우리가 보는 것들은 정확할까요?”

왼쪽에서 보면 6, 오른쪽에선 9로 보이는 그림 한 장과 보는 사람의 각도에 따라 마주 보는 사람과 컵으로 보는 그림, 두 장을 감상하고 해석하는 것으로 저자와의 만남을 열었다. 인문학 에세이 `융합의 식탁'을 출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들어온 북 콘서트 자리다.

`루빈의 컵'은 보는 이의 관점과 이해 각도에 따라 다양한 해석들이 나오는 그림이다. 청소년들은 사랑하는 남녀가 사랑스럽게 마주하는 장면이라고 해석하고 딸을 둔 어머니는 모녀가 다정하게 바라보는 장면이라고 말한다. 중년들은 시원한 칵테일 한 잔으로 보는데 시간이 지나 전경과 배경이 번갈아 가며 지각되는 역전 현상을 보고서야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세상 이치를 떠올린다. 보는 이의 축적된 경험과 해석 기준에 따라 배경과 전경의 자리가 바뀌고 중심과 주변의 자리, 선악의 자리가 바뀌니 정신 차리지 않으면 밤하늘의 별이 어둠을 뒤로한 채 저 홀로 발한다는 착각에 빠질 것이다.

1부 시작은 `세상을 읽는 기준을 바꾸면 본질이 보인다'는 부제목에 부합한 전래동화 한 편을 새롭게 분석하면서 과거 인간중심의 해석체계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루빈의 컵처럼 보는 이의 각도에 따라 사람으로도 보이고 컵으로도 보이며 얼마든지 다른 답이 나올 수 있는 작품이다.

또한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 따라 6이 되고 9가 되는 현상을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는 폭력으로 가치화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고 보면 인간의 역사나 철학의 역사는 각도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철학 가치, 종교 가치, 문화 가치에 수용된 본래 질서, 일관된 목적, 도덕 정부야말로 그 시대 지배층의 각도가 내린 선악 기준이기 때문이다. 조용히 앉아 있던 한 분이 `아기 돼지 삼 형제'도 인간중심으로 해석하여 악으로 평가된 늑대 이야기라며 흥분했다. 그 당시 기준 가치를 부지불식 수용하느라, 혹은 내 중심으로 세상을 보느라 “왜 그럴까?” 한 번쯤 시점 바꾸기를 해 본 적이 없단다.

작가의 관점이라고 다 옳은 것은 아니다. 작가가 중심인물로 설정한 주인공 시점으로 상황을 보지 말고 개별자로 바라보면 똑같은 상황이 역전하는 경우도 많다. 우리나라는 안중근 의사를 영웅으로 평가하지만, 일본은 테러리스트로 평가한다. 가치는 시대와 나라 인종, 성별에 따라 다르게 매겨진다. 늘 대하는 신문 기사도 신문사와 편집장, 기자의 입장에 따라 사건이 판이하게 달라지니 입체적 시각으로 비판적 읽기가 필요하다.

2부는 `선과 악의 정의'라는 부제로 진행됐다. 내게는 행복한 일인데 상대에게 불행한 일이면 악이고 역으로 상대방은 행복한데 내겐 불행한 일이라면 그것도 악이다. 나와 상대 모두에게 행복하고 이로운 일이면 선이고 모두 해롭고 불행한 일이면 악인데 그 이미지로 밤하늘의 달을 꼽는다. 스스로 빛나면서도 전체를 비추는 달이 대표적인 선의 모델이라는 결론이다.

모처럼 선악의 개념에 대해 돌아본 시간이다. 입체적 시각으로 세상을 본다면 큰 그림을 볼 수 있다. 세계는 천차만별의 무수한 존재자들이 저마다의 존재 방식으로 살아간다. 소는 소이고 사자는 사자다. 마틴 하이데거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빚은 `인간'이란 명명 대신 `현존재'라고 명명한 것처럼, 우리도 `거기 있는 것들' 평행 그대로 바라보며 대립하지 않고 엉키지 않는 질서 그대로면 된다. 중심 없이 드넓은 평원의 잔디처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