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붕이는 내 친구 (4)
붕붕이는 내 친구 (4)
  • 김영선 한국문화기술연구소 연구원
  • 승인 2022.11.24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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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그릇에 담긴 우리 이야기
김영선 한국문화기술연구소 연구원
김영선 한국문화기술연구소 연구원

 

이곳은 처음이었다. 낯선 곳에 가지 말라던 기숙사 선생님의 당부가 떠올랐다. 붕붕은 두려워 떨며 사방이 빨갛고 낯선 텅 빈 창고를 둘러보았다.

`아, 또 혼자라니.' 공간을 맴도는 바람 소리가 귓바퀴를 타고 귀청을 간질이며 음산한 분위기를 더했다. 얼굴을 찡그렸다. 벽에 걸린, 결이 갈라지고 패여 볼썽사나운 나무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의미일까?' 간판에는 포스터처럼 `0을 생각하시오!'라는 말이 쓰여있었다.

붕붕은 마음을 들킨 것처럼 볼이 달아올랐다.

“0을 생각하면 뭐가 좀 달라지기는 하나?” 마음이 약해져서 기운이 점점 빠졌다. 붉은 벽이 멀게 느껴졌다. 기분이 더 나빠지건 말건, 궁지에 몰린 순간에도 두뇌는 별걸 다 기억해냈다. 숲속 친구들이 모여 놀리던 일이 떠올라서 괴로웠다.

“내가 겁쟁이라고? 저희는 뭐가 잘났다고.” 구름이 킬킬대며 비꼬듯 하던 말들이 자꾸만 떠올라 무심결에 욕이 튀어나왔다. “두고 봐. 멍청이, 말미잘!” 욕마저도 메아리가 되어 고막을 파고들자 붕붕은 누워 멀리 뱉은 침이 다시 콧속을 파고든 것 같아 기분이 더 나빠졌다.

`머리가 잘못됐나?' 이상했다. 딱 절반만 기억났다. 욕은 먹었지만 왜 그런 일이 생긴 지, 숲에서 친구들이 무엇 때문에 화낸 지에 대한 앙금조차 기억에서 사라지다니. 머리가 지끈거리자 눈앞이 캄캄하고 몸 여기저기가 욱신거렸다.

벽은 시커멓게 변해가는 걸 신기하게 쳐다보다가 자신이 생각하던 문제가 뭔지 조금씩 기억에서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붕붕 앞의 세상은 점점 0이 되어갔다. 바람이 소리를 끌어와서 붕붕의 머리를 툭 치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벽에서 나는 소리일까?' 귀가 솔깃했다.

“네가 얼마나 똑똑한데. 넌 최고로 셈을 잘하는 아이야!” `누가 하는 말이지?' 붕붕은 입가가 벌어지고 눈이 아래로 쳐졌다.

“그렇지. 난 바보가 아니야!” 입술에 녹음기가 달려 자동으로 작동되는 것처럼 이상하게도 말이 힘없이 튀어나왔다. 사방 벽이 다시 파랗게 변해갔다. 붕붕은 누군가 조명 스위치를 움직이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스스로 소리친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한 말이 튀어나왔다.

“아무도 없으면 0이야! 0이 싫다면 다 나와!”

`돌겠네. 다 나오면 어쩌려고.' 붕붕은 자신이 한심했다. 다행히 주변은 조용했다. `이런. 안심하다니, 경솔했어.' 벽에 이상한 형체가 그려지더니 물결처럼 번졌다. 얼룩덜룩한 줄무늬를 한 벌 모양의 그림자 하나가 입술을 오므렸다 펴면서 소리를 냈다.

“아무렇지도 않다면 그건 `0'이다. 네 이름은 0이니?”

질문하는 상대를 보니 붕붕은 두렵기보다 힘이 났다.

“난, 붕붕, 숨지말고 용감하게 모습을 보여. 겁쟁이야!”

벽으로 다가서서 얼굴을 들이미는 내내 심장이 두근거렸다.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팔다리가 단단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벽을 주먹으로 힘있게 툭툭 건드렸다. 벽을 채운 그림자가 좌우로 그네를 타는 것처럼 흔들거렸다.

그림자는 도망치는 것처럼 그림자가 사라졌다. 붕붕은 시선을 옮겨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구멍이잖아!” 구못 자국처럼 작은 구멍이었다. 멍이 너무 작아서 그 면적을 0이라고 해도 될 것 같았다. 구멍 안으로 눈을 가져다 대었다. 바람이 숲에 갇혀 울리는 소리가 났다.

“에잇, 치사해. 나와서 나랑 놀자!”

어느새 익숙해진 방금 막 청소를 마친 홀처럼 방안은 텅 비어 고요했다. 붕붕은 허리가 간질거려 손가락으로 긁었다. 쓰라렸다. 이러다 피가나는 건 아닌지 염려됐다. 허리춤으로 시선을 돌리니 줄이 한 가닥 벗겨졌다. 남은 부분에는 파란색이 희미해진 게 눈에 띄었다. 툭 잡아당기니 동전 지갑 크기의 사각형 주머니가 구불구불한 줄에 매달려 끌려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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