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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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지연 한국교원대 초등교육과 교수
  • 승인 2022.11.23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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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현장
최지연 한국교원대 초등교육과 교수
최지연 한국교원대 초등교육과 교수

 

물건은 대부분 새것이 좋다. 빳빳하게 날이 선 새 지폐가 그렇고, 코팅이 온전한 새 프라이팬도 그렇다. 그런데 종이책만은 새 책보다는 헌책이 좋다. 은근 마니아층이 많은 냄새 중 헌책 냄새가 상위권에 올라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아마 애서가로 자처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책 좋아하는 사람은 아끼는 책의 초판을 구하기 위해, 혹은 저렴한 가격에 끌려서 헌책방을 찾곤 한다. 물론 정말 애서가는 출장이나 여행으로 들른 도시에서도 일부러 헌책방을 들러 온다고도 한다. 헌책의 묘미는 책이 풍기는 향기에서부터 귀한 보물찾기까지 참 다양하다.

그러나 뭐니 뭐니해도 헌책의 묘미는 책장 여백에 적힌 전 주인들의 메모에 있다. 대학원 시절 영어나 일어로 쓰인 책이 도서관에도 없고 국내에서 구하기도 어려울 때는 직구를 이용했었다. 저렴한 중고 서적을 구입하고 가장 저렴한 배송비를 얹어 책값을 치르면, 3개월도 좋고 6개월도 좋고 한참을 기다려야 책을 받을 수 있었다. 책이 배송되는 기간이 얼마나 긴지, 책을 기다리던 사이에 막혔던 글 줄기가 뚫리기도 하고, 새로운 논문을 찾아 문제를 해결하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주문한 책이 도착하면 마냥 좋았다. 직접 읽어보고 싶던 그 페이지에 타국에서 공부하는 연구자들은 무엇을 적어 놓았을까? 어느 부분에 밑줄이 그어져 있을까? 딱 그 문장이 중요하다 생각했는데 거기 밑줄이 있거나 생각지 못했던 말이 여백에 적혀 있을 땐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책의 전 주인이 오랜 벗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위대한 책들을 통해 좋은 삶을 발견하기'라는 부제가 붙은 `On reading well'에도 비슷한 고백이 있다. 저자인 캐런 스왈로우 프라이어는 이 책에서 잘 읽고 잘 살자는 메시지를 전한다. 종이 위의 글을 이해하기 위해 시간을 들이고 주의를 기울이며 집중하여 잘 읽으라 권한다. 그리고 한 가지, 잘 읽으려면 읽기를 즐기라고 조언한다.

이때 즐거움은 텔레비전 오락 프로그램이나 시트콤이 주는 기분 전환 수준의 즐거움이 아니다. 훌륭한 음식은 각각의 재료를 느리게 천천히 음미하여 먹어야 하듯 좋은 책 역시 그렇다. 이 즐거움이 가득한 책을 음미하는 좋은 수단이 바로 펜, 연필, 형광펜이다. 줄을 긋고 메모하며 책에 반응하는 것 말이다.

“책에는 아무것도 써넣어선 안 된다는 생각은 초등학교 시절의 불행한 잔재입니다. 책의 진정한 가치는 깨끗한 상태가 아니라 글과 생각에 있습니다. 한 친구는 독자가 책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책이 독자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지혜로운 말을 하더군요. 시인 빌리 콜린스 역시 그의 시 `여백에 쓴 글, Marginalia'에서 다른 독자가 여백에 써 놓은 글에서 순전한 즐거움을 발견하게 됨을 인상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깊이 음미하며 책을 읽은 결과가 여백에 적힌 글로 남는다. 또 그런 자취를 통해 독자가 그 책을 얼마나 깊이 즐겼는지 알 수 있게 된다. 그런 자취를 남긴 독자의 마음에 저자가 전하려던 메시지가 안전하고도 정확하게 도착했으리라는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연구실 이사 날짜가 쏜살같이 다가오고 있다. 작은아이가 책 정리를 해주겠다고 연구실에 들렀는데 책장 모서리가 접혀있고, 밑줄은 물론 여백에 낙서가 많은 데다 책에 이름까지 써 있다며 면박을 준다. 요즘 이런 책은 중고 책으로도 받아주지 않는단다. 그럼 이 책들은 어째야 하나 했더니 폐지라고 말하려다 말끝을 흐린다. 버리려던 책을 다시 책장에 꽂아 두었다. 어딘가에 나처럼 전 주인의 밑줄과 여백의 메모를 기다리는 수더분한 소비자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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