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의 비밀
씨앗의 비밀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22.11.15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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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김경순 수필가
김경순 수필가

 

서울 역사박물관 정문에 잇대어진 담을 끼고 돌던 참이다. 11월이 되니 길가의 나무들도 모두 시들해져 왠지 쓸쓸함이 감도는 날이었다. 햇빛은 찬란하게 세상으로 퍼지는데도 이상하게 옷깃은 절로 여미게 된다. 이게 바로 늦가을 빛이요 바람일거라는 생각을 했다. 잎을 모두 떨궈낸 억센 담쟁이 가지가 박물관 벽을 단단히도 옭아맸다. 가지 군데군데에 까만 알들이 옹글게도 매달렸다. 사실 처음에는 그것이 담쟁이 덩굴인지도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잎은 떨어지고 가지만 남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솔직히 산머루인줄 알았다. 까만 알만 보고는 아는 체를 했더니 서울 사람인 문학회 동인이 그건 담쟁이 씨앗이란다.

우리 집에는 십년도 넘은 산머루 넝쿨이 있다. 나무 담을 휘감아 담장의 몰골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그리도 왕성하게 가지가 굵어지고 뻗는 것을 미처 몰랐기에 벌어진 일이다. 이런걸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자세히 보니 이제야 우리 집 산머루 덩굴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산머루 넝쿨은 가지가 굵어지면 울퉁불퉁 나무거죽이 툭툭 불거지지만 담쟁이 가지는 억세긴 해도 불거지지는 않았다. 그런데 열매를 보니 아무리 봐도 산머루 알과 너무도 흡사하다. 알만 따서 본다면 구분하기가 쉽지 않겠다.

사실 우리 집에도 담쟁이가 산다. 벽이 아닌 화단 더러더러 놓인 정원석을 휘감았다. 봄이면 너무 뻗지 말라고 싹둑 잘라도 담쟁이는 여지없이 여름을 지나면서 쑥쑥 자라나 돌들을 푸르게 만들어 놓는다.

그리고 가을이면 제일 먼저 물을 들이는 녀석들이다. 생명력도 강하고 욕심이 많은 녀석이니 씨앗을 품고 싶은 마음은 또 얼마나 간절했을까. 그것도 모르고 언제나 봄이 되면 굵은 가지를 잘라 냈으니 씨앗을 만들 틈이 어디 있었을까. 그래놓고는 씨앗이 없는 줄 알았다고 하니 담쟁이가 억울해 할 일이다.

씨앗을 품는 일이 얼마나 숭고한 일이던가. 사람이나 짐승이나 식물이 무엇이 다를까. 생명을 잉태하는 일은 역사를 만드는 일이다. 어찌 사람에게만 역사가 있다는 말인가. 꽃 속에 심장을 닮은 씨앗을 품은 식물이 있다. 처음 그것을 보았을 때의 놀라움이란 무엇으로도 설명하기 어렵다. 풍선초, 열매의 처음은 연둣빛 작은 종이 잎처럼 생겼다. 시간이 지나고 살이 오르면 그 잎은 진초록의 열매가 된다. 그리고 바람을 넣은 듯 부풀어 오른 열매 속에는 작은 알갱이들이 토들토들 굴러다녔다. 그리고 가을이 접어들면서 하나 둘 갈색으로 여물더니 까만 알들을 토해냈다. 하얀 심장을 그려 넣은 앙증맞은 까만 풍선초 씨앗, 두 손으로 받쳐 들고는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 보았다. 잘 보아야 볼 수 있는 하트, 얼마나 사랑을 해야 그렇게 예쁜 심장을 그려 넣을 수 있을까.

자손을 만들고 그것을 퍼트리기 위해 희생을 마다하는 일은 숨탄것에만 한정 되는 것은 아니다. 식물들도 각자의 방법으로 자손을 퍼트리기 위해 혼 심을 다한다. 씨앗을 화려하게 만들어 새를 유혹한 후에는 그 새의 힘을 빌려 자손을 널리널리 퍼트리기도 하고, 씨앗 스스로 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날아가 자리를 잡기고 한다. 땅위를 바짝 엎드린 풀들은 사람의 눈을 피해 부지런히 씨앗을 만들어 우두두 쏟아 내는가 하면, 땅속에서 씨앗을 만들어 어느 결에 땅위로 밀어 올리는 식물도 있다.

그러고 보니 11월은 씨앗의 계절 인듯하다. 잎은 떨어져도 씨앗은 남아 더욱 옹골지게 몸을 달구고 결국에는 무르녹는 가을과 함께 떨어져 새로운 삶을 위해 땅으로 꽂히는 것을 보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끝이 아님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새봄이 되면 처음 본 모습으로 우리 앞에 화려하게 나타나 달뜨게 만드는 것이 씨앗의 힘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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