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물지 않은 곡식은 버려진다
여물지 않은 곡식은 버려진다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9.06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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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천
심 억 수<시인>

황소 뿔도 물러 빠진다는 삼복더위도, 천둥번개를 동반한 장마철이 이제는 우기로 바꾸어야 한다는 덥고 습한 날들도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9월로 접어들자 아침저녁으로 오소소 소름이 돋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니 가을이 가까워졌나보다.

아무렇게나 자라나던 풀포기들도 이제는 지친 모습으로 고개를 숙인 모습은 애처롭지만 어느새 누런 알곡을 조랑조랑 매달고 바람에 일렁거리는 벼이삭들은 정겹기만 하다.

가을은 모든 곡식이 여물어 가는 계절이다. 과실나무는 열매를, 곡식은 알곡을, 그리고 꽃들은 씨앗을 만들기 위하여 저마다 바쁘다. 여물지 않는 곡식은 버려진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지금 여물기 위하여 살아가고 있는 중이 아닐까

바람이 따뜻하던 지난 봄날 비닐봉지가 불룩 하기에 뜯어보니 무가 굵고 실한 싹을 불쑥 내밀고 있었다. 아내가 지난해 가을에 김장을 하고 남은 것을 비닐봉지에 싸서 넣어놓고 겨우내 두고 먹으려 얼지않게 갈무리를 해 두었나보다. 신통하기도 하여 볕바른 창가에 두었더니, 물 한 방울 없이도 날마다 새순을 키워 올리며 크기를 더 한다. 그렇게 열심히 크더니 작고 예쁜 보라색 꽃을 활짝 피웠다.

꽃을 다 피우고 푸르던 잎들이 누렇게 변하여 꽃들은 시들었는데도 무는 멀쩡하다. 그러나 시든 무꽃에는 한 알의 씨앗도 여물지 못했다. 거친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실내에서 자란 탓에 씨앗을 만들기까지는 힘이 모자랐나보다. 시든 꽃들을 잘라내고 겉모양이 멀쩡한 무를 들어보니 아주 가볍다. 왜 그럴까하여 무를 잘라보니 아뿔싸! 속은 텅 비어 있고 새까맣다.

새까맣고 텅 빈 무를 바라본다. 나는 내 자식이 귀하다는 생각에 자생력은 키워주지 못했으니, 새까맣게 텅 빈 무처럼 한없는 희생으로 여물지 않는 씨앗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점점 깊어가는 가을날 귀를 열어 여름의 혹독했던 날들을 맨살로 받아내고 실하게 제몫을 다하고 서있는 열매들의 소리를 겸허한 마음으로 새겨들어야 하리라. 자연은 저토록 자신의 삶에 충실하여 꽃피우고 열매 맺고, 시고 떫은맛을 곰삭혀 자신의 향기를 드러내고 있다.

나는 내 인생에 무슨 맛을 창조하고 있는 것일까 나의 인생은 과연 알곡으로 여물어 버려지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또한 내 아이들을, 여물어 버려지지 않는 삶이 되도록 잘 가르치고 있었는 지 뒤돌아보니 가슴이 쏴아 해진다.

찬비를 맞으면서도 가을의 초목은 목이 마른 것처럼 나도 자꾸 목이 마르다. 마실수록 수분이 증발되는 내 생의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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