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목(枯死木)
고사목(枯死木)
  • 김기자 수필가
  • 승인 2022.11.09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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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자 수필가
김기자 수필가
김기자 수필가

 

언제부터 저리 되었을까. 누워서 혹은 그대로 서서 세월의 고비를 함께 넘고 있는 모습이다. 제 몸을 휘감아 오르는 칡넝쿨에조차 마냥 관대하다. 오랜 시간 이미 잔가지들은 스러지고 껍질에는 곤충들이 살 수 있도록 거처까지 마련해주는 아량이 한없어 보인다. 살아있는 것과 죽어있는 것들의 조화로움이 이런 것일까. 고사목은 지금 내 눈에 생령生靈으로 다가오고 있다.

산길을 걷다보면 싱그러운 나무 냄새가 참 좋다. 더불어 새들의 소리도 이 모양, 저 모양 한껏 귓전에 청아하다. 나무들의 어깨동무에 눈마저 즐겁다. 크건 작건 간에 서로가 가지를 뒤엉키지 않고 서있는 듯해서 그렇다. 나무아래 있는 풀들조차 마찬가지로 평화롭다. 이처럼 작은 것 하나도 밀접한 관계가 되어 제 몫을 감당해가고 있었다. 세상살이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듯이 자연도 전혀 다르지 않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순간이다.

고사목에서 문득 친정아버지의 그림자를 떠올린다. 한참의 세월이 흘렀건만 오늘따라 저렇게 메말라 있는 나무에서 아버지의 흔적을 발견할 줄은 미처 몰랐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아마 넋으로 찾아오셨나보다. 잠시 훈훈해온다. 살아계실 때는 엄하고 멀기만 하셨던 아버지, 나는 지금 저 고사목에서 아버지를 만나고 있다. 오래인 것에서 묻어나는 채취, 그것은 사람처럼 떠난 자리에서 느껴지는 어떤 울림이었다.

그리 따뜻하지는 않으셨다. 유난히 아들만 편애했던 그 시절의 아버지는 때로 기억 속에 가두고 싶을 만큼 싫었다. 늘 피해의식에 잡혀있던 내가 아버지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은 세월이었다. 원망도 함께였다. 삶이 힘들 때는 더 심한 원망을 하며 지내왔다. 그래도 아버지의 눈빛은 나에게 곁길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오롯이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도록 만드셨다.

부모가 되어보니 세상을 읽는 눈이 조금은 밝아진 것 같다. 옳고 그른 것, 지켜야할 본분을 뼈저리도록 알게 하신 아버지의 그 무한한 도량이 이제야 가늠된다. 그렇게라도 내 삶이 온전하게 유지되어 온 것은 아버지의 관심과 애정 없이는 불가능 했으리라. 순간 한참동안 고사목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예전에는 죽은 나무를 보면 그냥 지나쳐 버렸다. 생명이 떠난 것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저 땔감정도로 여길 뿐이었다. 그러나 이젠 다르다. 모든 사물에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깊이가 있었다. 심지어 고사목이 되기까지의 여정을 그려본다. 푸르던 시절 열매를 맺고 그늘을 드리우며 자기 몫을 충분히 감당해 왔으리라 믿는다. 앞서 가신 부모님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그 뒤를 따라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머지않아 내 자신도 고사목이 되어 갈 것이다. 고사목의 형태가 된다 해도 사회와 가정에서 유익을 남기는 삶이되길 바란다. 거추장스럽지 않으며 자연 속에서 퇴화되어 가듯 그렇게 조용히 사라져가고 싶은 마음도 함께이다. 그러기 위해 지금부터라도 내게서 쏟아져 나온 말과 행동들이 후세에 보기 싫지 않은 모양새가 되도록 노력하며 살아야하지 않을까.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짧은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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