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재를 찾아 떠나는 가을 여행
하늘재를 찾아 떠나는 가을 여행
  • 강대식 충북정론회 고문·법학박사
  • 승인 2022.11.08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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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강대식 충북정론회 고문·법학박사
강대식 충북정론회 고문·법학박사

 

아침 기온이 춥다고 느껴질 정도로 차가운 주말. 강아지 물그릇에 얼음이 얼었다. 올해 들어 처음으로 얼음을 대하니 온몸이 더 오그라든다.

김장을 하지 못해 밭둑에는 배추가 싱싱한데 날씨는 겨울로 뛰어간다. 겨울이 오기 전에 가을 단풍을 보며 한가롭게 유유자적하며 중원문화의 발자취를 찾아보고자 집을 나섰다.

괴산 연풍을 거쳐 문경 하늘재에 도착했다. 오색으로 물든 가을 단풍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대지로 떨어진다. 떨어진 낙엽은 오솔길에 쌓이고, 드러났던 흙과 돌들은 모두 몸을 숨겼다. 하늘재에서 미륵대원지까지의 거리는 약 2km 정도여서 주변 경치를 둘러보며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하늘재는 백두대간을 넘는 최초의 고갯길이며, 새재(鳥嶺)가 생기기 전까지는 경상도와 충청도를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의 하나였다.

신라 경순왕이 멸망하자 마의태자(麻衣太子)와 덕주공주(德周公主)가 이 고갯길로 넘어왔다고 한다. 그들의 발걸음은 빨랐으며 두려웠을 것이다. 한 나라의 왕자와 공주였지만 망한 국가의 귀족은 오히려 주변 토호(土豪) 세력이나 산적(山賊)에게는 좋은 사냥감이었을 것이다.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현실에서 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신라의 부흥을 꿈꾸며 하늘재를 넘었을 것이다. 적에게 처참하게 도륙(屠戮)된 경주를 떠나야 했던 망국(亡國)의 왕족 가슴은 불어오는 실 날 같은 바람도 두려웠을 것이다.

때를 기다려 망해버린 신라의 사직(社稷)을 다시 찾고자 했던 마의태자는 하늘재를 넘어 미륵리를 지나 마애불이 있던 곳에 덕주사를 짓고 때를 기다렸다고 한다. 고구려나 신라 땅에서 보면 변방의 산자락 아래였으니 숨어지내기에도 좋았을 송계리에 터전을 마련했으나 신라를 재건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지 않자 마의태자는 미련을 접고 금강산으로 떠나버렸고, 덕주공주는 마의태자를 기다리며 덕주사에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이런 슬픈 망국의 한(限)을 생각하며 오솔길을 걸으니 왠지 가슴 한곳이 스산해 오는 것을 느낀다.

하늘재 중간에는 도요지 터가 남아있다. 누군가 열심히 고령토를 찾아다니며 흙을 빚고, 주변에 널린 소나무를 베어 도자기를 구웠을 사람들도 이제는 없다. 도자기가 백성들의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도구였으나 아무 곳에서나 만들 수 없는 물건이었다. 흙과 물, 그리고 땔감이 맞아떨어져야 도자기를 구울 수 있었고, 운반하기가 쉽지 않아 시장과 생산지가 가까워야 이윤이 많이 남게 된다. 그런 최적의 장소 중 하나도 하늘재였을 것이다. 지금은 네모난 표식 안에 여기가 옛날 도요지 터였다는 흔적만이 세월을 덮어 씌고 누워있다.

고개를 내려오면 미륵리 원터가 보인다. 도로를 따라 자란 은행나무의 잎새는 이미 모두 떨어져 대지 위를 나뒹군다. 이곳에 원터가 있다는 것은 이 고갯길이 중요한 도로였음을 의미함과 동시에 다음 역원(驛院)까지는 상당 시간이 소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만큼 도보로 여행하던 시절에 이 고갯길이 가진 역사적인 의미는 크다. 삼국이 서로 전쟁을 하던 시기에는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수시로 전쟁터가 되었고, 물산의 교역이 이루어졌던 무역로가 되기도 하였다.

짧지만 역사적으로 중요했던 하늘재가 아직도 건강하게 남아있다는 것은 충북인에게는 자랑인 동시에 축복이다. 시간이 되면 한번 걸어보라. 얼마나 크게 감동의 물결이 넘쳐흐르는지를 느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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