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구는 날
떨구는 날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 승인 2022.11.08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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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어스름한 새벽, 늘 그렇듯 옷을 껴입고, 비를 집어 들었다. 날이 제법 쌀쌀해졌다. 현관문 옆에 마련해준 자리에, 잠을 청한 길고양이가 흘낏 쳐다보고는 눈을 감고, 이내 얼굴을 다리사이에 묻었다. 여느 때 같으면 화들짝 놀라 줄달음 치던 길고양이가 밤새 추위에, 깊은 잠에 들지 못했던 듯 싶다. 고양이 눈이나 내 눈이나 잠에서 덜 깬 게슴츠레한 눈, 다시 잠에 드는 길고양이가 부럽다.

꼭두새벽부터의 비질은 꼭 어르신들의 수고로움을 덜어드리는 것만은 아닌게, 다른 쓰레기와 섞여 쓰레기 봉지에 담겨 허투루 버려지는게 아깝기도 하여, 잠에서 덜깬 눈을 억지로 몸보다 앞세운다. 이 맘때에는 길을 쓰는 어르신들의 비질 소리보다, 시도때도 없이 떨어지는 낙엽에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커지고 늘어져 장성곡이 되고, 매달려 있는 잎사귀를 커다란 장대비로 흔들어 대는 터에, 어르신들의 등장에 앞서 내 몸을 선제적으로 출격이다.

저녁 느즈막이 가로등의 도움을 빌어 쓸었건만, 밤새 수북하게 떨어졌다. 인근 공사장을 오가는 차량을 따라가는 잎에 더러는 되돌아 오는 잎에 새벽부터 분주한 낙엽이다. 비질에 순순히 모일리 없는 낙엽이다. 너무나 바짝 말라 부스러지는 낙엽, 바닥에 껌딱지처럼 바짝 붙어 있는 낙엽, 역시 힘이 다하면 바짝 붙어 있어야 하는 건가. 번질나게 거듭되는 거친 비질에도 요지부동이다. 이런 껌딱지 같은 낙엽 같은 이라고.

비질에 수북하게 모은 잎은 지난 일년의 시간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듯 하다. 내달리는 높은 탑차에 치여 생채기가 난 잎, 온갖 벌레에 갉아 먹힌 잎, 제대로 햇빛을 받지 못한 가무퇴퇴한 잎들이 모였다. 애써 모아논 낙엽이 쏜살같이 지나는 차량에 흩어진다. 흩어진 낙엽은 살랑바람에 바스락 거리며 뒹군다. 잎의 소리를 듣는다. 다해가는 일년, 한 순간의 쉼없이 일했노라고, 낮에는 햇빛에, 자야할 밤에는 해가 지면 바로 켜지는 가로등의 불빛에 쉼없이, 잠을 청할 새도 없이 일만 했다고. 그나마 햇빛을 잘 받아 누릴껏 다 누린 잎은 최대로 컸고 색도 이쁘게 들었건만, 구석에 쳐 박혀 있던 잎은 온전히 펼치질 못해, 한 귀퉁이 오그라들어 제대로 된 잎의 형태도 갖추지 못했고, 펼치질 못하니 제대로 된 색을 갖지도 못했다. 그러다 이젠 나무와 이별을 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끝나지 않을 건만 같은 어둠의 긴 터널, 끝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너무나 지리한 어둠의 시간은, 숨통을 조이고 날카로운 철사 끝으로 이곳저곳 찔러대며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던 터널이었다. 주변의 도움이 아닌 선동과 방관, 동참에 의한 `파잔 의식'에 늘 구석으로 몰렸다. 그러나 결코 죽지 않으면 벗어날 수 없는 곳에서 피할 수 있는 구석은 없었다. 애써 극복해 아무는 상처는 마음속 깊고 낮은 곳부터 쌓였다. 쌓인 상처는 굳은 살이 되었고, 석순이 자라듯 돌덩이가 되었다. 속에서 자란 돌덩이는 이제 깨질 수 없는 커다란 바위가 되었고, 밟힐 대로 밟힌 잡초만도 못한 미물로 몰려 뿌리마저 잃었다.

터널의 끝에 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제대로 된 잎보다는 잎의 형태를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상처가 심해 겨우 잎자루만 남은, 잎의 흔적이 많지만, 순을 틔였고 꽃을 피웠던 양분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끝은 한치의 여운 없이 여지없이 나무와 이별을 한다. 이별 뒤 지지리도 못났지만 열매가 제법 달렸다. 수고로움을 뒤로 지켜져야야할 동면의 계절, 나무에서 떨어진 잎은 떨어져서도 나무곁에 있고 싶어하나, 시샘하는 바람에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이다.

해들 거듭하며 많은 풍파를 겪고 견뎌왔지만 이리 지리한 겨울은 없었다. 끊임없는 삭풍의 시간속에서 무던히 이겨냈다. 떨굼은 거름이 되고 꽃을 피우고 잎을 펼칠 쉼이다. 나무는 제 자리에 있었고 해를 거듭하며 자랄것이고, 많은 것들과 함께 하며, 늘 그 자리를 지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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