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거기 있었느냐고 묻지 마라
왜 거기 있었느냐고 묻지 마라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2.11.01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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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분노의 심정은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까. 슬픔과 안타까움을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은 어느 선에 닿아야 멈추고 진정될 수 있는가. 과연 그런 억울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이 더 이상 벌어지고 저질러지지 않는 나라를 만들 수 있겠다는 희망은 아직 우리에게 남아 있는가.

대한민국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무려 155명이 목숨을 잃은 참사가 벌어진 것은 단순한 비극이 아니다. 국민은 `국격'의 급격한 추락에 좌절하고 있으며, 주권의 생명을 보호하지 못하는 `국가'를 또 다시 확인해야 하는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권이 서둘러 `강제'한 추모 기간이 지나기 전까지 국민적 트라우마는 더 깊어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한밤중에 깨어 위험한 소식을 처음 들은 이후 잠은 이룰 수 없고, 심상치 않은 느낌은 이내 극단의 분노로 치달을 수밖에, 다른 감정을 느낄 겨를은 사라지고 말았다.

<수요단상>의 제목으로 우선 떠오른 것은 `압살된 자유' 또는 `억눌린 죽음의 비극, 그들만의 자유'라는 극단의 표현이었고, 치 떨리는 분노는 사흘이 지난 지금도 온전하지 못하다.

은근히 강요하는 애도와 꼼수가 뻔히 드러나는 사후약방문의 화려한 임기응변으로 시간을 벌면서 위기와 비난을 피하려는 획책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건 정부도 국민도 마찬가지다. 이번에도 근본적 원인의 성찰을 미룬 채 군중 심리에 의해 발생한 어쩔 수 없는 사고로 결론짓는 악순환은 쉽게 고쳐지지 못할 것이다.

`거기 왜 갔느냐'는 거기 맨 앞에 등장하는 `꼴통'이고, `서양 축제에 어쩌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미쳐 날뛰는가'라는 생각은 `국뽕'이다.

물론 핼러윈이 무려 기원전 500년 무렵부터 유래된 고대 켈트족의 전통이며, 본질과 달라지면서 미국에서 풍습처럼 커진 축제인 것은 맞다. 용산의 미군과 이태원의 주둔지 상권이 맞물린 상업자본주의에 호도된 축제라는 비난도 감수할 수밖에 없다. 문화원형을 탓하지 말라.

`귀신 분장으로 죽은 이들이 살아 있는 이를 알아채지 못하도록 한다'는 핼러윈의 의미에 이 나라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까닭의 근본적인 원인을 파악하기 위한 국가적 사회적 성찰은 그동안 어떠했는가.

12년의 긴 학교생활 동안 오로지 대학입시를 위해 영혼과 육체를 갈아 넣어야 했던 능력주의의 서슬은. 숨만 쉬고 있을 뿐 `압살(壓殺 crush to death)의 위험과 얼마나 다를 수 있는가. 그리고 국가와 사회는 그들 젊은이들이 끊임없이 보낸 위기와 절망의 신호를 얼마나 주의 깊게 들으려 했는가.

노는 방법도, 놀 수 있는 시간도, 마음껏 자유를 방출할 수 있는 공간이나 기회조차 절대로 주어지지 않는 살벌한 입시지옥에서, 능력주의가 온통 지배하는 사회에서 핼러윈은 어쩌면 청춘의 해방구일 수 있다.

가면과 분장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끝내 자신이 드러나는 것이 조심스러운, 그리고 그런 신기하고 색다른 모습을 바라보며 사람들 속에 머물고 싶어 하는 청춘의 외로움. 이태원은, 그리고 핼러윈은 사람이, 노는 것이, 축제가, 사무치게 그리운 사람들의 군집이며 새롭게 충전할 수 있는 일탈의 과정으로 국가와 사회는 충분히 보호했어야 했다.

`서울은 만원이다'라는 표현은 이미 한계를 넘어섰다. 지방 소멸은 중차대한 국가의 걱정거리가 되었고, 몇 년째 지방분권을 말하지만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문화적으로 개선될 기미가 없으니 구호로만 남아 있다. 정권이 바뀌면서 그나마의 의지도 실종되고 있으니, 숨 막힐 지경으로 과밀한 서울은 아주 오랫동안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참혹하고 끔찍한 사고로 코로나19의 사슬에서 겨우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던 지방의 축제와 행사가 한꺼번에 얼어붙었다. 추모의 시간과 '근조`의 단어가 사라진 공무원들의 검은 리본이 서울과 지방이 다를 수 없지만 공권력에 의해 강조되는 애도는 공감을 얻기 힘들다.

관제와 대기업, 민간의 주최자 없음을 강조하는 중단 없고 단호한 책임의 회피가 결국 그들만의 민간 중심 시장경제주의의 '자유`였음으로 확인된 이태원의 억눌린 죽음. '혐오`의 대상을 찾아 마녀사냥을 획책하지 말라. 분발하여 분권하며, 놀 줄 알고, 놀 수 있는 청년으로 살게 하라.

숨 막히고 피 말리는 수능이 며칠 남지 않았다. 이게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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