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이 익어간다
감이 익어간다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22.11.01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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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김경순 수필가
김경순 수필가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면서 풀과 나무들이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나무에 달린 잎들은 노랗고 붉은색으로 가을을 장식하며 자신들의 계절은 정작 지금이란 듯 화려한 빛으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하지만 사람의 손에 길들어 여려진 남새는 무서리에도 맥도 못 추고 스러져 갔다. 담장을 기어오르던 넓은 잎을 자랑하던 호박잎과, 매운 맛을 보여주던 고추, 붉은 토마토는 된서리가 내리던 날 밤 급살이라도 맞은 듯 생을 마치고 말았다.

봄부터 시작한 초록 생명들의 여정이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결실을 맺고 있는 중이다.

나무가 가을을 맞고 겨울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며 떠날 때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생각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 주고도 결코 초라하거나 쓸쓸해 보이지도 않는다.

온몸으로 실천하는 거룩한 성자라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닐 듯싶다. 사람에게서는 쉬이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우리가 옷을 입듯 나무도 봄부터 시작해 서서히 잎이 옷이 되어 갈아입기 시작한다. 연두 빛으로 시작해 뜨거운 여름에는 진초록으로 세상을 푸르게 물들였다. 그러더니 이제는 알록달록 눈이 부신 가을 무도회를 벌이고 있다.

어제는 오랜만에 가을 구경을 했다. 버스 차창으로 보이는 산과 들은 어느새 가을이 절정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마을을 지날 때였다. 벌써 잎을 다 떨군 감나무 한그루를 보았다. 처연함이다. 잎을 모두 떨군 나무는 주홍 열매를 대롱대롱 달고 서 있었다.

순간, 가을의 모습은 저런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홍 감은 밤이면 서리를 맞고 낮에는 타는 듯 갈 볕이 내리 쏘지만 그 어디에도 막아줄 잎 하나 없이 온전히 혼자 견뎌야 한다. 떨어질까 단단히 가지를 꽉 부여잡고 그렇게 하루하루 고통도 이겨냈다.

고통이 겹겹이 쌓이는 동안 감은 안으로 삭이며 빨갛게 익어 간다. 잎들은 왜 그리 서둘러 떨어졌을까. 좀 더 열매를 지켜주지 못했을까. 사과, 배, 복숭아는 열매가 다 익을 때까지 잎들이 얼마나 든든하게 지켜주던가. 아니 열매를 사람에게 모두 주고도 잎들은 자신들의 잔치를 화려하게 벌이고 겨울을 맞지 않던가. 잎이 있어 뙤약볕과 비바람 앞에서도 과일은 견딜 수 있었을 테다.

하지만 감들은 그 어디에도 숨을 데란 없다. 그늘도 없이 온몸으로 추운 밤과 뜨거운 낮을 견디고 있는 감들이 대견했다.

익어가는 감을 보면서도 나는 마음 한 곳이 아파왔다. 가을은 풍성하고 흐뭇해야 한다는데 그럴 수가 없다. 어젯밤, 된서리라도 내린 듯 꽃다운 청춘들이 또 스러져 갔다. 6년 전의 4월처럼….

겨울이 문 앞에 있는데 붉은 청춘들을 달고 있던 나무들은 어찌 견딜까. 꼭 잡고 있을 줄 알았던 열매들이 이리도 무참히 떨어질 줄 누가 알았을까. 할로윈 데이, 축제가 아니고 아픔이고 슬픔이다. 아들을 잃고 딸을 잃은 부모에게는 더 이상 축제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산과 들은 단풍으로 가을을 말하고 있건만 우리들 가슴에는 벌써 겨울이 들이닥친 듯 춥기만 하다.

어느새 차는 감나무가 있던 산야를 지나 이제는 공장지대를 끼고 달리는 중이다. 거대한 회색 건물들이 즐비하다. 이상과 현실의 경계인 듯, 달라도 너무 다른 풍경이다. 삶도 이런 것일까. 우리 앞에 무엇이 기다릴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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