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백
방백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22.11.01 16: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타임즈 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그녀는 예뻤다. 무대에서의 모습은 요정이요, 천사였다. 섹시와 우아함이 어우러진 춤과 노래는 단연 최고였다. 뮤지컬을 보는 내내 최정원, 그녀에게 빠져든다. 몸짓은 한 마리의 나비가 되고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목소리는 관객을 휘어잡는다. 여리여리한 몸에서 무대를 이끌고 가는 저 강한 카리스마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작품은 나 혼자 하는 게 아니다. 호흡을 맞추어 함께하는 예술로 파트너와 관객과의 교감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오늘의 공연은 모두가 푹 빠져버렸으니 환상적인 감동의 무대인 셈이다. 긴 여운이 남는 시간이다. 그녀의 매력에 매료된 날이었다.

뮤지컬이 끝이 났는데도 바로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하고 있다. 한참 뜸을 들이다 일어선다. 그 순간 영화가 끝난 뒤에 올라가는 자막처럼 세익스피어의 말이 불현듯 떠오른다.

“인생은 연극이다” 온 세상은 무대이고 모든 사람들을 배우라 했다. 일생동안 7막에 걸쳐 여러 역을 연기한다는 것이다. 선한 역일 때도 있고 악역을 맡을 때도 있다. 늘 좋고 마음에 드는 역할만 할 수는 없다. 조연이기도, 주연이기도 또 화려한 주인공일 수도 있다. 어떤 역이 주어지든 자기의 배역을 연기하는데 충실히 하라는 것이다.

연극에서의 대사는 세 가지로 대화와 독백, 그리고 방백이다. 배우가 다른 배우와 마주 이야기하는 것이 대화다. 독백은 상대 없이 혼자서 하는 말을 뜻한다. 다른 인물들이 무대 위에 있어도 그들은 듣지 못하고 관객들에게만 들리도록 약속이 되어있는 방백이 있다.

가장 가까이에서 나의 무대에 많이 등장하는 인물은 가족이다. 살면서 수많은 일들을 함께 겪은 이들이다. 긴 세월을 힘들다는 핑계로 나는 입을 다물었었다. 아무리 말을 해도 해결이 되지 않자 해도 소용없다는 생각이 말문을 닫게 했다. 차라리 독백이 편했다. 이즈음에는 옆에 있는 그이가 보이지 않았다. 풍선처럼 터질 듯 아슬아슬한 내 아픔만이 안타까웠다. 답답한 마음이 켜켜이 쌓여만 갔던 허송으로 흘려보낸 나달이었다.

둘이 해결했어야 했다. 그이와 마음을 터놓고 진지하게 대화로 풀었어야 했다. 말문이 닫히니 마음의 빗장도 걸려 그이를 무시하고 비난하는 독소를 뿜어댔다. 나로 인해 그이는 주위에 아주 못된 사람이 되었다. 아내를 비참하고 불행한 사람으로 만드는 나쁜 사람을 만들었다.

나의 이 아픔을, 힘듦을 알아달라고 무대 밖의 사람들에게 애고땜을 늘어놓은 것이다. 그들의 말은 잠시의 위로일 뿐 정답이 아니었다. 아무도 그 무엇을 해결해줄 이는 없었다. 실제의 극중에서는 관객과 소통하면서 인물의 심리와 사건 전개에 대한 극적 요소를 살릴 수 있는 장점을 가진다. 인생에서는 내 치부만 드러내는 일이었음을 깨달았다. 먼 거리를 돌아와 나이 쉰에 방백을 끝냈다.

한동안, 암전이 지나간 무대엔 그이와 내가 서 있다.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다. 둘은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을 읽어낸다. 무대 위의 주인공이 돋보이는 건 조연이 있어서다. 내가 주인공으로 살 수 있는 건 그이라는 빛나는 조연이 있어서다. 티내지 않고 뒤에서 묵묵히 살펴주는 나의 팬이기도 하다.

이제 사랑한다고 서로에게 상처를 허락하지 않으리라. 막이 내려질 때까지 혼잣말 없이 대화로 이어가리라. 그렇게 서로의 말을 들어주고 알아주며 찬란한 인생 6막을 준비하리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