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반투(半透) 현상
사유의 반투(半透) 현상
  •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 승인 2022.10.19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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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룡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나는 고3 때 당구에 미쳐 살았다. 당시에는 그게 뭘 의미하는지 몰랐다. 아이들이 게임에 빠져 세월을 보낸다는 게 뭔지 알고 있을까? 모른다. 사회생활을 해봐야 비로소 알게 된다. 사랑에 빠져 세상이 달라 보이고 마냥 즐겁기만 할 때 자신의 삶이 사랑의 결실인 자식에게 매이게 된다는 걸 알까?

사랑의 즐거움이 너무 커서 모른다. 이런 일들은 살아봐야 안다. 그래서 살아본 사람들은 아직 덜 살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해주려 하지만 그렇게 하면 꼰대라는 소리를 듣는다. 우리 세대도 부모, 특히 아버지를 꼰대라고 불렀다.

인생에는 이런 일이 많다. 경험해보지 않으면 서투르고 경험을 해봐야 관록이 쌓여 초짜가 보지 못하는 걸 볼 수 있게 된다. 초보 때는 그리 어렵던 차선 바꾸기나 주차가 경력이 쌓이면 능수능란해진다. 아무리 많이 배운 사람도 군대에 가면 어리버리하고 사수에게 기술을 전수받아야 한다. 조수가 보지 못하는 걸 사수는 보고, 살아본 사람은 알지만 아직 안 살아본 사람은 모른다. 경험과 세월은 투명한 막을 통과하는 게 아니고 반투막을 통과하는 것과 같다. 앞으로 겪어야 할 일은 보이지 않지만 이미 겪은 일은 그 전개 과정이 뻔히 보인다.

인간 사유 공간은 이런 반투(半透) 현상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곳이다. 사색이 깊어지면 불가사의한 일들이 일어난다. 특정 지점을 통과하기 전까지는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른다.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 지를 도무지 알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사색(종교적 성찰)의 여정을 깜깜한 방에서 전등 스위치를 찾는 일과 같다고 말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의 공간에서 더듬거리며 헤매다가 우연히 전등 스위치를 건드리면 온 공간이 환해져 속속들이 다 볼 수 있게 된다. 스위치를 찾은 사람은 모든 걸 다 볼 수 있지만 아직 찾지 못한 사람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다 보고 있는 사람이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더듬거리며 헤매는 사람들을 보면 답답할 것이다. 스위치를 찾으면 세상이 환해질 것이라고 이야기를 해줄 수는 있지만 그런 사실을 안다고 해서 모든 걸 다 볼 수 있게 되는 건 아니다.

열심히 살면 되지 스위치를 왜 찾느냐고? 개미굴에서 목숨을 바쳐 일하는 개미들만큼 열심히 사는 생명이 있을까? 극미량의 꿀을 부지런히 실어 날라 우리가 먹는 대량의 꿀을 축적하는 벌들만큼 열심히 사는 목숨이 있을까?

우리가 보는 세상을 벌과 개미는 보지 못한다. 그런데 우리는 벌과 개미의 세상을 손금 보듯 훤히 보고 있다. 개미들에게 개미굴은 세상 전체이지만 그걸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개미굴은 지극히 협소한 공간일 뿐이다.

인간 세상은 다를까? 우리도 열심히 산다. 우리도 벌과 개미처럼 못보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가 사는 세상을 벌집과 개미집 보듯 훤히 보고 있는 존재가 있지 않을까? 개미의 전 세상이 개미굴에 불과한 것처럼 우리의 전 세상도 지극히 협소한 공간이 아닐까? 곧 우리는 지극히 협소한 공간에 갇혀 사는 게 아닐까? 경찰서 심문실의 거울 뒤에서 보면 심문실이 보이지만 심문실에서는 거울 뒤의 공간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어딘가에 갇혀서 세상 뒤의 세상을 보지 못하고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지극히 협소해서 자유롭지가 않다.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는 거울 뒤의 세상(진리)을 봐야 한다. 진리가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고 하지 않는가. 굴레를 벗어던지고 자유롭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지만 거울 뒤의 세상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더 답답하다.

인간 사색의 반투 현상을 인정하면 거울 뒤 세상에 관심이 없는 사람보다 훨씬 더 답답해진다. 답답함을 느낀다는 건 자신이 갇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걸 의미한다. 답답해야 나갈 길을 찾게 된다.

/충북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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