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속으로
가을 속으로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22.10.18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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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김경순 수필가
김경순 수필가

 

가을이 무르녹는 오후, 길을 나섰다. 지인과 점심을 먹고 용산저수지 둘레 길을 걷기로 했다.

어느새 이리도 가을이 깊어졌을까. 길섶 키 작은 풀꽃은 별 같은 꽃불을 켜 놓고는 바람에 살랑살랑 몸을 맡기고 있다. 연분홍 꽃을 단 고마리, 보랏빛 뾰족한 얼굴을 한 꽃향유, 빼빼마른 가지에 엷은 자주 빛의 좁쌀 같은 작은 알맹이를 다닥다닥 붙이고 선 개여뀌, 부끄러움을 타는 소녀의 모습을 한 쑥부쟁이, 그야말로 야생초들의 계절이다. 이상하게도 야생초들은 다붓다붓 모여 있기를 좋아한다. 그리 몸을 맞대고 있으니 웬만한 바람에도 넘어지지 않으리라.

그러고 보면 야생초들은 홀로 피어 있으면 눈에 잘 띄지 않아 그냥 지나치기가 십상이다. 반면 장미처럼 정원에서 피는 꽃은 홀로 피어나도 크고 화려해 사람들의 눈에 금방 들어 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원의 꽃들은 사람의 손을 타지 않으면 벌레들의 습격이나 병으로 제대로 자랄 수가 없다. 잘 정돈된 정원은 풀 한포기, 벌레 한 마리도 범접을 못한다. 수시로 화학 성분의 약을 주기도 하고, 영양제를 처방하기도 한다. 겉으로 보기에 참 깔끔한 듯 보이지만 사람이 잠깐 방심을 하게 되면 금방 무너져 버리는 게 정원의 꽃들이다.

우리 뒷집이 그랬다. 할머니의 정원과 마당은 언제나 깔끔했다. 봄이면 키 큰 자두나무에서 탐스런 하얀 꽃이 마당을 밝혀주고 가을이면 실한 열매로 할머니의 얼굴을 웃게 만들었다. 하지만 실한 자두를 먹기 위해 가끔 농약을 치던 모습을 나는 잊지 못한다. 마당에도 할머니는 허리가 아프셔서인지 제초제를 뿌리곤 하셨다. 그런데 할머니가 집을 떠나고 난 네 해 동안 뒷집은 그야말로 무법천지로 변해 버렸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자두나무보다 더 큰 개복숭아 나무는 봄이면 꽃분홍색 꽃들을 가지마다 가득 달고 마당의 주인이 된지 오래다. 하지만 개복숭아 열매는 벌레가 파먹어 제대로 익지를 못하고 떨어지고 만다. 그리고 정원 여기저기를 밝히던 나리꽃과 장미꽃도 보이질 않는다. 아마 들풀에 눌려 제대로 자라지 못해 장미는 고사한 듯 하고, 나리꽃은 군데군데 보이기는 하나 제 빛을 발하지는 못하고 있다. 신기한 일은 산에서나 볼 수 있는 잔대와 취나물이 꽤 많이 보인다는 사실이다. 낮은 나무 담장을 사이에 둔 우리 집 뒤란을 거닐다 보면 뜯고 싶다는 충동이 일기도 하지만 빈집을 선뜻 들어가지 않게 된다.

뒷집의 땅을 밟고 자라난 환삼덩굴과 며느리밑씻개는 번식력이 얼마나 왕성한지 월담을 하기 일쑤다. 남편이 낫으로 덩굴을 아무리 쳐내도 며느리밑씻개는 금새 자라 담장에 턱을 고이고는 보라색 작은 알갱이를 흔들어 보인다. 들고 나는 사람이 없으니 키 크고, 억센 놈들이 살아남는 식물들의 전쟁터다. 하지만 그렇게 전쟁터 같은 곳이 날짐승과 들짐승에게는 사람을 피해 숨을 수 있는 안식처가 되어 주기도 한다. 박새부부도, 산비둘기도 콩새와 참새 무리도, 빈집 처마 이곳저곳에 둥지를 틀기도 하고 키 큰 나무 위에서 쉬어 가기도 한다. 사람이나 식물이나 살아가는 모습이 왜 그리도 닮았는지 모르겠다. 정돈이 안 되면 어떨까. 열매가 덜 달리면 어떨까. 사람의 욕심으로 세상은 점점 힘들어지고 병들어 가는 게 얼마나 많던가. 있는 그대로 자연을 보아주면 안 될까. 작은 몸이지만 서로 기대어 어우렁더우렁 살아가는 작은 생물들의 모습처럼 말이다.

우리는 어느새 산길로 접어들었다. 사람의 발소리에 놀랐는지 다람쥐 한 마리가 저만치서 산으로 휘리릭 사라졌다. 다람쥐가 있던 자리를 지나다보니 통통한 도토리와 깍정이가 나뒹굴고 있다. 벌써 다람쥐는 겨울 식량 준비로 바쁜가보다. 어디선가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을 다람쥐를 생각해 우리는 서둘러 그곳을 지나왔다. 추수의 계절, 산짐승들에게 넉넉함을 베푸는 가을 산이 오늘따라 위대해 보이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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