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 떨어지는 날
감 떨어지는 날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 승인 2022.10.11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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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10월의 햇살이 내려앉은 오후, 검은 길고양이 `지지'가 감나무 그늘을 지붕 삼아 널브러져 잠에 취했다. 잠시 후에 나타난 노랭이의 심술에 엎치락뒤치락하다 잔디밭 끝에서 끝까지 쏜살같이 달음박질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엎치락뒤치락하다 갑자기 멈추더니 감나무 위로 올랐다. 그도 잠시 거꾸로 내려오더니 다시 뛰어오르고, 다시 엎치락뒤치락 엉겨 붙는다. 한참을 뛰놀더니 언제 그랬나 싶게 달콤한 잠을 청한다. 털끝 하나하나에 내려앉은 햇살이 부서지는 10월의 오후, 제집인 양 터를 장악한 길고양이의 망중한이다. 길고양이의 순간순간을 쫓아 응시하다 괜스레 배시시 웃는다.

해거름 뒤 어둠에 길고양이들은 달빛의 보호를 받으며 잠자리로 찾아들었고, 한낮 털끝에 부서지던 햇살은 밤하늘에 가득 깔렸다. 이내 구름은 솜이불이 되어 덮는다.

뚝! 뚝! 간간이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에 잠이 깬다. 밤새 연이어 성가시게 구는 모기와 씨름하다 잠을 청해도 취하지 못함에 머리가 무겁고 멍한데, 창문을 닫아도 머리 한쪽을 두드린다. 견디다 못해 잠자리를 옮긴다. 일기예보보다 일찍 비가 내리고 있다. 어스름 속 가로등이 빛을 잃고, 보슬보슬 비가 내리는 듯한데 소리도 없고 빗방울은 보이지도 않는다. 단지 디딤돌 색이 검회색에 불빛을 받아 광이 살아있는 짙은 검은 색이 되었다는 것, 색이 변한 디딤돌에 눈이 멎었다. 그렇게 넋 놓고 밖을 바라본 지 얼마나 흘렀을까?

동이 트자마자 언젠가부터 정신 사납게 제집 드나들 듯하던 것들이 날아들었다. 감나무 주인은 안중에도 없다. 떼 지어 날아들어 당연히 자기 차지라 동네방네 다 들으라는 듯, 지저귐이 아니라 괴성에 가까운 소리다.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지 소리는 집중적으로 날아드는 칼날이다. 진드거니 먹는 게 아니라 매번 그랬듯 요란하게 탐하는 돼지인 듯하다. 그러잖아도 무거워진 감에 축 늘어진 나무가 땅에 닿았다 하늘로 솟구쳤다. 정신 사나운 것들이 서로 먹겠다 싸우고 있다. 먹던 감이나 계속해서 먹을 것이지 이 감 저 감 다 쪼아 놓는다. 그러다 너저분해진 몇 개의 감은 정신 사납게 구는 터에 떨어진다. 다른 새들은 아예 범접을 못 한다. 워낙 드세니 까치마저 먼발치에서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다. 탐할 때도 난리를 치더니 뒤끝도 작렬이다. 일찍 꽃눈을 만든 영산홍에, 뒤늦게 피운 수국에 똥이 퍼질러졌다. 그간 싸댄 똥은 비가 오면서 씻겼는데 또 한 푸데기 싸대고 날아간다. 이런 똥이나 싸발리는 직박구리 같으니라고. 그래 봐야 서리 내리기 전까지다. 달고 맛나 부드럽게 넘어가는 것만 골라 먹는 것도 서리 내리기 전까지다. 그때까진 네 몫이겠지, 그래도 다른 새들에게도 양보하면 좋으련만, 독식하다 많은 것은 땅에 떨어뜨린다.

짙은 녹색을 잃어가는 감나무 잎을 응시한다. 쓸쓸할 것 같은데 온아하다. 소리마저 감미롭다. 감나무 잎이 전하는 살랑이는 소리는 엄중한 박자를 초월했다. 시간이 지나가며, 감이 색을 달리하는 사이 잎은 간간이 떨어진다. 땅으로 내려앉은 잎은 먼발치서 맑은 호박(琥珀)을 닮아가는 감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터질 듯 속을 보일 듯 변해가는, 끝까지 같이 있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긴 채. 달달한 열매를 즐기는 일은 다른 이들의 몫이라. 모진 비바람, 찢어질 듯한 천둥과 번개, 격한 불볕더위를 겪고 굳건히 제 몫을 다하던 잎은, 열매가 무르익을 때가 되어 자리를 뜬다. 떨어지고 쌓여 땅이 얼지 않게 덮어주고, 썩어 거름이 되리니 떠서도 그 밑이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또 겨울이 오겠지? 오랜 겨울잠에 익숙해졌는데, 가시덤불 속 숨 막히게 가슴 조이며 버틴 겨울이 거듭되진 않겠지? 한겨울 눈이 시린 창공 아래 오롯이 혼자라도, 한숨 돌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공활한 하늘의 겨울이라면, 말갛게 익어 새들에게 내어주고 남아 메말라가는 까치밥 하나가 되어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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