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전화
10월의 전화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2.10.04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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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10월은 전화(電話)가 품고 있는 의미로 시작된다. 일요일이던 10월 2일은 전화가 이 나라 역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일을 했는지를 기억해야 하는 날이다. 전화는 이날 한 청년의 소중한 목숨을 구했다.

이 땅에 전화가 처음 설치된 것은 1896년의 일이다. 고종황제가 머물던 덕수궁에 전화가 설치된 이후 3개월 만에 인천까지 가설공사가 이루어졌다. 이때 전화의 이름은 덕률풍(德律風). Telephone을 음역한 것이다.

“대군주(고종)께서 친히 전화하신 것만은 사실이었다.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은 그때 경성부 안에는 이미 전화가 가설된 지 오래였으나, 인천까지의 전화 가설공사가 완공된 지 3일째 되는 병신년 8월 26일(양력 1896년 10월 2일)의 일이었다. 만에 하나 그때까지 전화 준공이 못 되었다면, 바로 사형이 집행되었을 거라고들 하였다.”

백범일지에는 당시의 상황이 위와 같이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 고종이 살린 인물은 김창수. 나중에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 독립운동은 이끈 김구 선생이다.

백범은 국모인 명성황후를 살해한 원수를 갚기 위해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군 장교와 격투를 벌이다 살해한 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인천형무소에 복역 중이었다. 고종황제가 김창수의 목숨을 살린 전화를 건 날은 사형집행일을 불과 사흘 남겨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각 죄수의 심문서를 보고받던 고종이 김창수의 `국모보수(國母報讐:국모의 원수를 갚다)'라는 죄목을 발견했고, 형무소에 전화를 걸어 죄를 한 단계 감하도록 명한 결과 백범은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백범이 그후 조국의 독립운동과 건국의 정통성, 그리고 해방 후 분단을 막기 위해 분투했던 역사는 한 통의 전화가 결정적 역할을 한 셈이다.

우리나라 휴대전화 보급률은 99%에 달하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집집마다 있던 유선전화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으며, 할머니, 할아버지부터 손자, 손녀에 이르기까지 가족 구성원 대부분이 각자의 휴대전화를 사용하고 있다. 심지어 한집에 살고 있는 가족 구성원끼리도 얼굴을 마주 대하는 대신 휴대전화로 비대면 소통한다.

어차피 전화는 간접 소통 방식으로 시작된 것이다. 공간과 장소를 초월해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를 확인할 수 있는 편리함이 있으나, 실물이 직접 만남으로써 오감을 모두 충족시키기에는 모자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유선과 무선을 넘나드는 음성신호 체계를 통해 그나마 서로의 존재와 의사를 알아차리는 인간적 감각을 유지해 왔다.

듣는 것은 보는 것에 못 미치고, 보는 것은 만지는 것에 어림없다. 영상을 통해 얻는 물건들이 상상하지 못할 만큼 실망을 주는 이유는 착각과 교란의 시각적 현혹과 실체와의 차이를 예감하거나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잠시도 손에서, 품에서 떼어놓지 못하는 휴대전화의 일상화, 일체화 속에서도 목소리 대신 문자나 이모지, 이모티콘이 대신하는 세상에서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틈은 없다. 우리가 따뜻하지도, 다정할 수도 없는 기호의 상징체계로 감동을 받을 수 있으려면 얼마나 더 기계적으로 진화하여야 하는가. 그런 시스템에서도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무미건조하게 사람과 만나기 위해서는 또 얼마나 단순하게 퇴화해야 하는가. 사나운 날씨로 10월이 시작된 탓인지 계절을 실감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라며 그리워할 `가을 편지'에 대한 낭만적 환상을 포기한 일은 더 이상 새삼스럽지도 않다.

다만 세상 어디쯤에는 아직 그대를 그리워하며 그대의 소식을 메마른 휴대전화의 문자가 아닌 생생한 목소리로 전해지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음을 기억하는 일로 10월이 채워지기를 소망한다.

손바닥 크기만도 못한 휴대전화의 믿을 수 없는 현란함에 빠져 습관적으로 시야를 좁히고, 시각이 현혹되는 대신 누군가 그리움에 사무치는 사람들의 전화번호를 기억해내는 10월.

지금쯤 어떤 간절한 사람은 그대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요동치고 살아있음에 감격하는 10월을 내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세상에 무심한 말은 없고, 굳이 그 음성을 분석하면서 기억에서 지워 내려 안간힘을 쓸 이유도 없다. 덕률풍은 도덕률과 멀리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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