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 장민정 시인
  • 승인 2022.10.03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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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장민정 시인
장민정 시인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 십오 년을 살았다 //

빈 창고같이 휑댕그렁한 큰 집에 /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꾹새가 울었고 /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 이른 봄 /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서 /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 고양이들과 함께 /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 이 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 무섭기도 했지만 /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 나를 지탱해 주었고 /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 나를 지켜주는 것은 /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 그랬지 그랬었지 /

대문 밖에서는 / 늘 /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이 시는 대하소설 <토지>를 집필하신 소설가 박경리 선생이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남기신 `옛날의 그 집'이란 시라고 알고 있다.

나는 선생의 이름 석 자 앞에 여류라는 수사는 어불성설이며 참 불손하다고 생각했었다. 누구도 닿을 수 없는 거성이며 높고 멀고 차원이 다른 어마어마한 어른으로 추앙해야 마땅하다고 여기며 옷깃을 여미듯 조심스럽게 선생을 바래기하곤 했다.

그런 어른이 발표한 시 `옛날의 그 집'을 읽으면서 나는 줄줄 울음을 그칠 줄 모른다.

그랬구나, 그랬었구나, 그때 그 시절, 한갓 여자란 남성들의 부속물에 불과했던 시절이었다. 일제와 6.25 전쟁과 군사독재 등 격랑의 시대를 선생 홀로 버텨낸 절절한 아픔을 어찌 말로 할 수 있겠는가? 고매하신 어른인 박경리 선생이 내 이웃인 아주머니나 고모님과 똑같이 겪으며 사셨다니! 선생도 틀림없는 여자였고 또한 과부였음을 가슴 저리게 깨닫는다.

내겐 청상과부 고모님이 한 분 계셨다. 스물한 살 어린 나이에 돌도 채 안 된 아기를 안고 친정으로 되돌아온 고모님이시다. 그래도 친정이 꽤 벌쭉해서 그나마 의지하고 그럭저럭 살았는데 6.25 전쟁의 분탕질에 친정 아버님을 잃고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형편 속에서 친정살이는 바늘방석이 되어 서서히 독립이라는 것을 준비하기에 이른다. 말이 독립이지 하인들이 여럿인 집에서 남이 해준 밥이나 먹던 사람이 대체 무엇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했던가! 천한 것 다 되었다는 비아냥을 들으며 양갓집 여자가 할 짓이 아니라는 식당을 우겨서 열었는데, 며칠도 못 버티고 문을 닫아야 했던 사건이 있었다. 여자 혼자서는 아무 짓도 할 수 없는 시대였다. 과부가 차린 식당이란 소문 때문인지 놈팽이들이 식당에 들어오면 죽치고 앉아 나갈 생각들을 안 하니 도저히 식당을 할 수 없었다는.

그뿐인가? 밤마다 담 넘어 기웃거리는 사내들이 늑대처럼 무서웠다고 고개를 내젓던 고모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대문 밖에서는 / 늘 /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그랬었구나. 선생도 우리 고모님과 똑같았어.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적막했을까? 어떻게 그 어려운 세월을 건너오셨을까? 빨리 늙었으면 좋겠다던 고모님의 탄식이 오버랩 된다.

`모진 세월 가고 /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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