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요, 우주까지”
“사랑해요, 우주까지”
  • 김시진 크렉션 대표·교육학 박사
  • 승인 2022.09.29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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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김시진 크렉션 대표·교육학 박사
김시진 크렉션 대표·교육학 박사

 

최근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아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아직 한글을 제대로 읽고 쓰지 못해서다. 적어도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즐겁게 노는 것이 배움이고 성장이라는 나름의 교육관, 일에 정신이 팔려 시간이 없다는 핑계, 학교 가면 잘 따라가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공부가 늦어진 것인데 이제서야 슬슬 현실로 다가온다.

한글은 기본이고 각종 학습지 공부를 한다는 주변 엄마들을 보면서 내가 너무 무신경한 것은 아닌가 자책하기도 했다. 막상 성적표를 받으면 마음이 바뀔 것이니 그냥 미리 하라는 이야기는 수백 번도 더 들었다.

사실 한국의 아이들은 너무 많은 공부를 한다. 지나쳐도 부족함이 없는 것이 공부이긴 하지만, 문제는 부모의 불안감을 조장해 그 시기에 필요하지도 않은 과도한 인지교육에 아이들이 희생된다는 것이다. `두뇌발달의 골든타임', `공부습관 길러주기'와 같은 자극적인 홍보 문구에 한 번쯤 흔들리지 않은 엄마가 어디 있을까. 특히 일하는 부모에게 이런 상황은 더욱 견디기 힘들다. 어린이집에서 전화가 오기만 해도 가슴이 철렁하고, 준비물을 제대로 챙겨주지도 못해 죄송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데, 아이를 붙잡고 공부를 시키다니. 차라리 사교육 손을 빌리는 것이 몸도 편하고 마음도 편한 방법이다.

우리 아이들은 행복할까? 여전히 교육은 계층이동의 사다리이기 때문에 조금 힘들어도 참고 견디면 되는 건가? 지금껏 그래왔으니 앞으로도 그래야 하는가? 유엔아동권리위원회는 `신체, 정신, 정서, 문화, 인격의 주체성을 확립해가는 영유아기에 특정한 영역에 치중된 자극만을 제공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유아의 과잉학습을 방지하고 놀권리를 실현하는 것은 아동인권의 문제이고, 이미 이 시기에 부모의 배경에 의해 교육 격차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우리 사회에서 교육은 모두가 다 하니까 나도 할 수밖에 없는 경쟁적, 획일적 시스템 속에 있다. 사회구조적 문제 때문에 발생한 결과를 개인의 책임으로 고스란히 떠안게 되는 것이다. 더 늦기 전에 공교육이 영유아들에게 주어진 시간을, 흔들리는 부모의 마음을 세심하게 들여다 봐야 한다.

도저히 이 상황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할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얼마 전부터 아들과 글자공부를 시작했다. 아들은 오늘은 쉬고 싶으니 내일 하면 안 되느냐고 사정을 하기도 하고, 몰래 책을 숨기기도 한다. 나는 곧잘 따라한다 싶어 받아쓰기해 보자고 했다가, 방금 공부한 글자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부글부글 화나는 마음을 꾹 참고 누른다. 그래도 새로운 단어의 뜻을 설명하고, 함께 이야기를 만들며 보내는 시간은 이전에는 몰랐던 또 다른 즐거움이다. 이렇게 책을 펴고서야, 아들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알고는 대화가 부족했음을 깨닫는다.

엄마한테 하고 싶은 말을 써달라고 졸랐다. 아들은 무슨 말을 쓸까 고민하더니 `엄마 사랑해요, 엄마 우주까지'라는 삐뚤삐뚤 글씨로 스케치북을 채운다. 세상 모든 걸 다 얻은 것 같다. 부모는 아이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이 시기에 얼마나 빨리 국어, 영어, 수학 지식을 습득하느냐보다 마음껏 뛰고 놀 수 있는 시간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사랑하는 아이에게 행복한 시간을 선물하는 것, 흔들리지 않는 모습으로 충분한 애정을 주는 것, 아이들의 내일을 위해 공동체가 나서는 것이 아이들이 원하는 어른의 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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