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명숙 청주문인협회장 수필가
  • 승인 2022.09.26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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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명숙 청주문인협회장 수필가
정명숙 청주문인협회장 수필가

조석으로 선선해질 즈음이면 해마다 고구마 줄거리로 김치를 담근다.

우리 집 텃밭에도 고구마를 심었으나 심심풀이로 하다 보니 줄기는 가늘고 질겨 먹을 수가 없다.

게다가 잎은 고라니가 다 뜯어 먹었다.

오늘 아침, 초라한 줄기를 바라보던 아랫집 동숙 씨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자기네 고구마밭에 가서 맘껏 따 가라고 한다.

다른 집보다 늦게 심은 동숙 씨네 고구마밭은 무성하게 뻗어간 굵고 연한 줄기와 잎이 숲을 이뤘다.

초입에서부터 줄기를 따기 시작했다.

몇 발짝 가지 않아 두둑이 휑한 곳이 보이기 시작한다.

고개를 들고 사방을 둘러봤다. 전체 면적의 삼 분의 일은 파헤쳐져 있고 실뿌리 같은 어린 고구마가 간신히 뿌리에 매달려 버티고 있다.

멧돼지의 소행이다. 사방으로 철망을 쳤어도 땅을 파고들어 오는 걸 막을 수 없었나 보다.

해가 서산마루를 넘어갔다.

숨어 있던 어둠이 몸을 풀기 시작한다.

울타리 넘어는 울창한 숲이다. 가까이서 멧돼지가 나를 노려보는 것도 같고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공포가 밀려온다.

일손을 놓고 발자국도 떼지 못하고 있다. 더 이상 밭에 머물 수가 없다. 돼지가 무서워 도망치는 나약한 인간이다.

집으로 돌아와 반도 채우지 못한 소쿠리를 마당에 던져놓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빠르게 뛰는 심장은 쉽사리 진정되질 않는데 외출했다 돌아온 동숙 씨 남편이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한다.

농사를 망치는 산 짐승 때문에 몇 군데 보이지 않게 덫을 놓았다고 한다.

하마터면 멧돼지 대신 덫에 걸릴뻔했다며 아무 일 없어 천만다행이란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보이지 않는 위험과 공존하는 일은 공포다.

평온한 일상에 도사리고 있는 것들도 방심하면 재앙을 불러온다.

주변에는 직접 보고 느낄 수 없는 서로 다른 이름으로 걸린 덫이 얼마나 많은가.

덫에 걸려 거센 바람 속을 걷고 고통에 흔들리는 이는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많다.

세상의 모든 덫은 사랑과 욕망과 욕심이란 이름으로 놓인다.

자신의 헛된 욕망과 욕심으로 타인 앞에 덫을 놓고 있는 살벌함은 상대를 처절하게 하나 눈먼 사랑의 덫을 찾아 얼마나 많은 이들이 방황하던가.

덫에 걸리면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조차 잊고 극단으로 치달아도 시간이 흐르고 상처가 아물면 뿌리 깊은 나무처럼 어떤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을 터다.

고구마 줄기를 제대로 따 오지 못한 나를 보고 동숙 씨가 몹시 미안한 표정으로 웃는다.

남편이 덫을 놓은 줄 몰랐단다. 다음에는 혼자 가지 말고 같이 가잖다.

생존을 위해 농작물을 파헤치는 멧돼지를 어찌 탓할 수 있으랴만 덫에 대한 두려움으로 한동안 고구마밭 출입은 못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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