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교육
관계의 교육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8.31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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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교육 칼럼
오 희 진 <환경과 생명지키는 교사모임>

여름방학이 끝나고 개학이 됐다. 학교는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운동장에 들어서는 데 사람 사는 소리가 들리고, 복도에 학생들 오가고 반가운 느낌이 맨 먼저 가슴에 물든다.

사람 사이에서만 관계의 교육이 그 벌떡대는 심장 소리를 내며 인사를 나누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방적인 생각일 수 있다. 개학을 앞두고 뉴스는 '야, 개학이다!' 대신 '개학 앞둔 학생들, "학교 가기 싫다"'라는 표제를 달아 개학을 코앞에 둔 학생들의 무거운 마음을 전하고 있다. 그 내용은 방학숙제 걱정, 2학기 시험부담, 개학 후 반복된 일상의 되풀이 등으로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간 교육개혁에 그치지 않고 교육 혁신을 내세우며 학교 주체의 참여적 변화를 부추겨온 중간 결과가 학교 안에서만 번역되는 암호, 구두선에 지나지 않고 있음의 반증인가. 아니면 이미 시작된 교육계 내부의 변화와 혁신의 수고를 짐짓 모른 체 하는 바깥 사회 고정관념의 흠집 내기인가. 문제는 새벽까지 컴퓨터하고 TV보고, 낮 12시까지 늘어지게 늦잠 자는 여유를 누리던 학생들의 방학생활이라는 것이 바른생활 모범학생의 표준과 영 다른 세계의 삶이라는 것이다. 탈학교가 주는 해방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이 게으름과 자유의 타성은 학교가 보기에 교문에서 반드시 차단되고 출입이 봉쇄되어야 할 잘못된 습관으로 단죄된다.

개학날 학생들을 운동장에 엎드려뻗쳐 놓고 정신교육이라고 강변하는 어느 학교의 모습을 보라. 그런데 이를 교육상 어쩔 수 없다 거나 아예 교육=훈육, 체벌이라고 두둔하는 여론 중에는 정말 사심 없이, 그리고 매우 성실하게 삶을 살아가는 이도 있다는 사실이다. 150년 전에 나온 밀의 자유론에는 그런 사정을 '관습이 지닌 마술적 영향력' 때문이라 표현했다. 그 힘은 사람들이 자신의 견해를, 단지 그 생각을 많은 사람들이 함께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충분히 이성적이라고 단순하게 믿어버리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밀에 따르면 '사법적 처벌이나 여론의 관점에서 모든 사람이 지켜야만 한다고 제시된 규칙들을 실제로 결정짓는 주요한 요인은 사회 또는 그 사회의 일부 힘 있는 사람들의 선호나 혐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현실의 주요 인과율을 제공하는 분야 중의 하나로 교육을 손꼽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교육이 입시체제로 짜여져 시험 경쟁에 학생뿐만 아니라 온 국민이 초강력으로 내몰려 있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부분 지금 교육되고 있거나, 지나온 생의 어느 시기에 교육된 이들이다. 그리고 그 교육의 장소는 피할 수 없이 학교가 된다. 학교는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알튀세르)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교육을 통해 지배적 관념을 생산해내는 장치이다. 이 말은 위에 언급한 밀의 말이 학교에서 실제로 이루어짐을 나타낸다. 그리하여 교육=미래임을 누구나 입바르게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아름다운 삶을 가꾸는 과정으로써 다가오는 오늘(coming today)의 교육인가 아니면 오늘을 인질로 삼아 언젠가(someday) 풀려날 것을 기회 삼는 추상의 언약의 암기인가 오늘 아프간에서 살아 돌아온 인질들의 환한 웃음을 맞이하기 위해 가족과 온 나라가 소용돌이에 휩싸인 사건에서 우리 교육현실의 거울을 보는 일은 모두가 거기 사로잡혀 고통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학교는 학생에게 다른 일(사람)에 신경쓰지 말고 공부만 하라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다 너를 위해서 그러는 거야." 공부와 다른 일(사람)이 관계를 맺을 수 없게 되면서 공부의 목적인 관계맺음은 애당초 출발선에 설 기회마저 빼앗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그 관계의 교육이 맺고자 하는 인간(세상)이란 무엇인가를 집요하게 질문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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