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트렉 그림의 餘白(여백)
로트렉 그림의 餘白(여백)
  • 강석범 충북예술고 교감
  • 승인 2022.09.07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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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산책
강석범 충북예술고 교감
강석범 충북예술고 교감

 

`이 그림 원본이 이랬던 거야?'와~ 내가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 처음 갔을 때, 2~3층을 연결하는 복도 기둥에 걸려있는 커다란 그림 앞에서 그만 얼어붙었다. 지금의 기억으로 높이가 4m는 족히 되어 보이는 대형 유화그림이다. 갈색의 걸쭉한 캔버스 천에 마구 낙서 하듯 거칠고 자유분방하게 붓으로 그어진 형상들은 유화 그림이기보다는 드로잉에 가까웠다. 작품에 배경색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실물을 직접 보니 배경색은 따로 칠해져 있지 않고 그냥 캔버스 천 위에 영락없이 낙서처럼 끄적인 것이었다. `세상에나~' 틀루즈 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 1864~1901)은 그렇게 나와 강렬하게 만났다.`이렇게 마구 휘둘러도 그림이 되는구나!' 그런데 그림에서 서너 걸음만 떨어져 보면, 정말 기막힌 구도와 색채 등, 조형적으로 화면에서 빈틈이 안 보인다. 분명 캔버스의 반 이상은 붓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림이 꽉 차 보이는 건 도대체….

로트렉 그림은 그랬다. 완벽한 화면 구성을 위해 고민한 흔적 없이 그저 유희하듯 그렸을 뿐인데(물론 내 생각이다) 구도와 색채가 단단하게 채워진다. 이런걸, 천재라고 하는 걸까?

로트렉은 당시 프랑스 명문 귀족 사회에서 횡횡했던 근친결혼의 전형적인 피해자였다. 백작 가문의 혈통을 이어가고자 백작이었던 아버지와 그의 사촌이었던 어머니의 결혼으로 로트렉이 태어났다. 근친결혼의 유전적 결함은 선천적 허약 체질로 이어져 어릴 때부터 뼈가 자주 부러지는 등, 로트렉은 키가 정상적으로 자라지 않는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외적 모습에 절망하는 무기력함을 보이지 않고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권리를 예술로 찾기 시작했다.

원래 천부적인 소질이 있기도 했지만, 로트렉은 성격이 유쾌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긍정적이어서 현실 그대로의 삶을 솔직하게 그려냈다. 고흐 등 인상주의 작가들과의 교류로 그들의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이념과 유행에 관심 두지 않는 자신만의 철학으로 당시 인상주의와 전통주의 미술양식의 극단적 대립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예술 활동을 이어갔다. 특히 사회에서 신분, 경제적으로 하류계급에 속하는 술집 무용수와 창녀들이 그의 작품 주요 모델들이었다.

로트렉이 자신의 작품세계를 완벽히 찾을 때쯤 작품들은, 대부분 물랭루즈에서 무용수나 창녀 또는 술에 취한 사내들을 그릴 때였다.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로트렉은 화면에서 자기가 그리고 싶은 주제 부분을 노골적일 만큼 의도적으로 표현했다. 그렇다고 나머지 공간을 무시하는 건 절대 아니다. 어쩌면 동양화에서 이야기하는 `그리지 않되 그린 것'이라는 여백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차린 것 같다. 예를 들어 치마가 황 갈색이면 갈색 캔버스천을 그대로 살려, 치마 색은 칠하지 않고 외형 드로잉만으로 치마를 그려내는 것이다. 이렇듯 `그리지 않되 그린다'라는 의미를 이론적으로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화면에서 그 질서를 고스란히 찾아내는 대범함은 늘 나를 경이롭게 한다. 어쩌면 장애로 인해 욕심껏 채우지 못한 삶을, 화면 곳곳에 여백의 공간으로 남겨둔 게 아닐까…. 비록 장애를 극복하지 못하고 37살이라는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자유로운 영혼이었으며 위대한 예술가였던`꼬마신사(키작은 로트렉의 별명)'로트렉에게 경의와 존경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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