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의 소야곡
추석의 소야곡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22.09.06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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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김경순 수필가
김경순 수필가

 

밤새 바람살이 거센 비까지 몰고 와서는 집밖이 요란했다. 역대급 태풍 힌남노가 우리나라를 통과한다는 말에 사람들을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드디어 어젯밤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그리도 요란하던 밤이 지나 아침이 되니 태풍도 힘이 약해져 서서히 동해안으로 빠져나가는 상황이라고 한다.

밤새 안녕이라더니 어젯밤 전국은 태풍으로 아수라장이 된 곳이 많았다. 가로수가 뽑히고 도시가 물에 잠긴 곳도 있었다. 포항에서는 물에 잠긴 도시에서 해병대의 장갑차가 시민들을 구하는 모습이 뉴스를 장식했다.

우리의 대명절인 추석이 코앞이다. 하지만 태풍피해를 입은 많은 사람의 몸과 마음은 자연재해로 명절은커녕 피해복구로 명절을 맞아야 할 듯싶다. 올해는 유난히도 재해가 많았던 해였다. 그로 인해 농작물이 제대로 자랄 수가 없었다. 길고 길었던 장마는 농작물을 무르게 만들었고, 또 수확이 가까워진 과실들은 이번 태풍으로 손실이 컸을 것이다. 그러니 자연 명절 상에 올려야 하는 과일과 채솟값이 천정부지로 오를 일은 자명하다. 이미 과일이며 채솟값이 너무도 비싸 명절을 맞을 일이 걱정인 차였다.

그렇잖아도 명절이 다가오면 며느리들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맏며느리인 나도 지난주부터 김치를 담그며 명절준비에 들어갔다. 명절은 즐거워야 한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음식준비로 며칠 전부터 종종대다 보면 허리도 아프고 급기야는 머리까지 지끈지끈 아파온다. 요즘은 여자들도 거의 직장을 다닌다. 그러니 집안일과 직장에서의 일을 병행하는 것은 정말 버거운 일이다. 그럼에도 집안일은 여자들의 몫인 게 한국사회의 현 주소이다.

어린 시절 추석날은 정말 설레는 날이었다. 엄마는 추석이 가까워져 오면 추석날 입을 빔을 대목장에서 사오셨다. 4남매의 막내였던 나는 이웃집에서 얻어 오거나, 언니나 오빠에게 물려 입는 옷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명절이 얼마나 기다려졌을까. 빔이 생기는 것도 좋았지만 추석날 밤이면 아버지가 비춰주는 횃불을 따라 뒷동산에 올라 소원을 비는 것도 설레는 일이었다. 산 밑에 있던 우리 집은 외딴 집으로 사과 과수원을 운영했다.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않았음에도 종갓집인 까닭에 명절이면 청주에서 오는 작은할아버지 가족을 대접하느라 아버지와 어머니는 진땀을 빼셨다. 결혼을 하고 맏며느리라는 이름으로 제사를 모시다 보니 어머니의 삶이 얼마나 곤곤하셨을지 가슴이 저릿하다. 친정집은 일 년 열두 달 제사가 없는 달이 없었다. 나는 맏며느리이긴 하지만 작은집이라 아버님과 어머님 두 분 제사만 있는데도, 직업이 있어서인지 기일과 명절이 가까워 오면 마음이 무거워 바장거리게 된다.

그런데 어제, 인터넷으로 뉴스를 보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추석 차례상 ‘전’ 올리지 마라, 예의가 아니다.”라는 기사를 보았기 때문이다. 성균관에서 표준안을 내 놓았다는 내용이었다. 기름에 튀기거나 지진 음식을 올릴 필요가 없다는 것과 음식 가짓수가 최대 9개면 족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차례상 표준안 사진도 띄워 놓았다. 아,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이 또 있을까. 이제는 전 부치느라 허리가 욱신거릴 필요도 없고, 시장 지갑도 가벼워지니 시름도 덜었다.

나는 기회다 싶어 네 군데의 신문 기사 내용을 우리 가족 카톡 방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올 추석 상차림 음식은 9가지로 결정했음.”이라는 말도 덤으로 끼워 넣었다. 남편의 표정이 어떨지 상상은 가지만, 뉴스에도 나왔으니 남편도 어쩔 수 없겠지 하는 마음에 기분이 날아갈 듯했다.

명절은 온 가족이 오랜만에 만나 그동안 못다 한 정을 나누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명절은 정을 나누는 시간보다 허례허식에 얽매어 정작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는 날이었다. 이번 추석에는 나도 우리 아버지가 그랬듯 우리 아이들과 나란히 서서 둥근 달님을 보며 각자의 소원을 비는 시간을 만들어 보고 싶다. 그래서 아이들이 지금의 내 나이가 되었을 때, 추석을 그리워하고 소중하게 여길 수 있다면 나도 아이들도 그보다 더 좋은 추석선물은 없지 않을까. 내일은 대목장이다. 간소해진 차례상에 장바구니도 가벼워졌으니 다 큰 자식들이지만 양말 한 켤레씩이라도 빔으로 준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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