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고도 넓은 공감
뿌리, 깊고도 넓은 공감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2.09.06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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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불휘 기픈 남ㄱ·ㄴㅂ·ㄹ·매 아니 뮐ㅆ·ㅣ 곶 됴코 여름 하ㄴ·니」

용비어천가 1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니 꽃이 좋고 열매가 많이 열린다'는 뜻풀이로 지나간 태풍 힌남노를 돌아본다. 1초에 불과한 순식간에 40m 이상의 엄청난 속도로 세상을 공격한 초강력 태풍 힌남노는 걱정했던 것보다 피해를 크게 주지 않아 다행이다.

곳곳에 상처를 남긴 태풍을 두려워하는 맨 앞의 위험은 사람의 생명에 관한 일이다. 사람이 살아있으면 재산 피해쯤은 얼마든지 회복이 가능할 것인데, 목숨을 잃는 일은 다시 돌이킬 수 없으니 경계의 최우선 순위는 당연하다.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다고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나무는 없다. 비교적 무사히 우리 사는 곳의 범위를 빠르게 벗어난 태풍 힌남노가 남긴 뽑히고 잘린 나무의 흔적을 기억하는 일을 용비어천가 1장으로 반추한다.

뿌리가 그저 깊다고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나무는 없다. 깊고 곧은 생각에 흔들림은 없을지언정 뿌리째 뽑히지 않으려면, 깊은 만큼 넓은 뿌리를 가져야 사방으로 흙을 단단히 부둥켜안으며 버틸 수 있다. 홀로 일직선으로 자라는 고집 대신 잔뿌리를 얼기설기 뻗어가며 서로의 의지와 각자의 할 일을 연대할 때 나무는 위험하지 않다.

세상의 모든 나무가 때가 되어 잎을 떨구는 것은 잔뿌리의 건강함을 위한 것이다. 잎으로 지표면을 덮어 맨땅이 드러나지 않게 하면서 수분을 유지하고 온도가 급격하게 오르내림을 막는다. 쓸쓸하고 애잔한 낙엽의 별리(別離)가 나무 전체의 생명을 건강하게 지켜주는 착한 순환의 섭리인 셈이다.

국내외적으로 큰 인기를 얻은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등장한 경남 창원시의 팽나무가 몰려드는 관광객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다는 소식이다. 굵은 줄기를 감싼 금줄에는 소원을 빌면서 꽂아놓은 돈이 주렁주렁 매달린 대신 뿌리를 덮고 있던 풀은 제거됐고 맨땅을 짓밟는 사람들의 발길로 인해 벌써 잎을 떨구고 있다. 맨몸을 드러낸 위기에 처한 잔뿌리를 보호하기 위한 팽나무의 안간힘이 서둘러 낙엽을 만들고 있다.

재난 앞에서 사람의 목숨을 지키는 일에 골몰하는 인간은 다른 생명체, 특히 식물의 피나는 생존본능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생명윤리의 차별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감행하고 있다.

태풍 힌남노는 `사상 초유'이거나 `역대급' 등의 긴박하고 위태로운 예고를 남발한 만큼의 상처를 주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대체로 안도하면서 일상으로 복귀할 것이다. 피해가 크지 않음으로 그 엄청난 자연의 위협에 대한 경각심은 상대적으로 줄어들 것이다. 지구온난화와 기상이변, 그리고 탄소중립 등의 재앙이 당장 눈앞에 드러나지 않음으로써 그 긴박함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과 같다. 어쩌면 대통령이 밤새워 비상대기하는 특별함과 철저한 사전 예보와 대비 등 과학적(?) 재난 대응의 결과로 태풍이 순하게 물러났다는 용비어천가를 부르고 싶은 마음이 새삼 간절한 무리들도 있겠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빠른 자극은 반드시 거기에 걸맞는 속도의 대응과 처방이 필요하다는 경고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태풍 힌남노의 빠른 소멸만큼, 벌벌 떨며 불안하던 기억조차 빠르게 잊고 말 것이다.

빠르고 위태롭게 엄습한 태풍의 위협이 불과 몇 시간 만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빠져나갔다고 해서 앞으로의 우리 삶은 충분히 안전하지 않고, 해결된 근본의 문제 또한 아직 없다.

며칠째 시커먼 하늘이 걷히고 모처럼 쪽빛을 드러낸 가을 하늘을 시름없이 올려볼 수 있는 일. 길옆에 줄지어 늘어선 나무들의 아직은 푸른 잎이, 말간 얼굴로 빛을 반사하는 모처럼의 모습은 경이롭다. 그 찬란함은 견고한 콘크리트 아래에서 깊고 넓게 사투하는 뿌리의 굳건함과 줄기의 힘찬 상승, 그리고 잎새들의 간절한 호흡이 조화를 이루는 `공감'의 힘으로 만들어진다.

공학과 기술로 다스려질 수 있는 재난과 재앙은 없다. 자연과의 깊고 넓은 공감이 세상의 모든 생명을 비로소 온전하게 할 것이다.

모두에게 더 깊고 넓은 공감이 절실한 추석이 되시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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