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여름은 지나갔다
그렇게 여름은 지나갔다
  • 김용례 수필가
  • 승인 2022.09.01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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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용례 수필가
김용례 수필가

 

요즈음은 새벽부터 예초기 돌아가는 소리로 숲 속이 소란스럽다. 추석이 오는 소리다.

늘 고요하던 숲 속이 이맘때는 사람 사는 세상 같다. 마당에 놓인 돌도 녹여버릴 듯이 뜨겁던 불볕더위도 순해졌다. 폭염과 장마 가운데 있을 때는 이 여름이 빨리 지나갔으면 했는데 벌써 그 뜨거움이 못내 아쉽다.

이웃에 사는 그녀를 오랜만에 만났다. 몇 걸음이면 만날 수 있는 그녀와 여름이 다 가도록 만나지 못했다.

나이 들면 한가할 줄 알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더 분주하게 사는 것 같다.

“어떻게 지냈어요? 올해는 우리 물놀이도 한 번 못 했는데 여름이 다 지나갔네요” 하며 그녀가 반갑게 웃는다. “그러게요. 아들 며느리가 다녀가 간 것밖에 없는데 이렇게 시간이 지난 네요” 하며 나도 웃었다.

입 짧은 며느리가 밥을 잘 먹고 갔다. 비는 하루돌이로 내리고, 그러니 풀에게 발목 잡혀 꼼짝 못했다. 그녀는 나에게 “큰 손님 치루셨네요”한다. 세상이 변하여 아들 며느리가 큰손님이 되었다.

그녀의 말처럼 물놀이 한번 못하고 가는 여름이 아쉽다. 뒤꼍에서 파라솔을 펴놓고 음악을 들으며, 차가운 캔 맥주를 마시며 즐기는 그녀와 나만의 여름놀이가 있다.

꽃에 물을 주는 호수로 몸에 물을 뿌리고 놀다가 뜨거워지면 다시 물을 뿌리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어느 바닷가 어느 계곡으로 가지 않아도 충분히 즐거운 놀이다. 물놀이 몇 번이면 삼복더위도 거뜬히 넘긴다. 뜨거움도 젊음도 그때 맘껏 즐겨야 하거늘 어리석어 환경을 탓하고 덥다는 핑계로 여름을 보낸 건 아닌지 돌아본다.

내 젊음은 오래도록 머물 줄 알았다. 어느새 이순을 넘긴 지 오래되었다. 이 여름이 눈 깜박할 사이에 지나갔듯 내 젊음도 그렇게 지나갔다.

잘 노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다. 잠시 머뭇거리다 보면 해가 넘어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여름은 뜨거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열정도 있다. 인생의 여름에는 시시한 것이 없고 눈물도 웃음도 최고의 계절이다. 놀고 싶은 것도 배우고 싶었던 것도 많았다. 용기를 내지 못하고 망설이고 재다가 그냥 시간만 흘려보냈다.

산을 넘어가면 무엇인가 있을 것 같아 죽을힘을 다해 그 산을 기어이 넘어 보고 싶은 게 젊음이다.

도도하고 힘이 세고 양보보다는 쟁취하고 싶은 강한 욕구가 강하다. 그러나 여름을 지나보면 힘을 빼야 성숙한 인간으로 아름답게 늙어간다는 것을 알게 된다. 노희경 작가의 디어 마이프렌즈에서 할머니에게 삼십 대 후반의 손녀딸, 완이가 인생이 뭐냐고 물어본다.

구순의 할머니는 아주 간단하고 조용하게 “별거 읍서” 라고 대답하신다.

완이는 뭔가 특별한 것을 기대했는데 별거 없다는 할머니 말에 맥이 빠지는 듯했다.

화가와 뜨거운 사랑 중인 완이는 작가다. 엄마 친구들의 이야기를 글로 써 책을 내려고 한다. 결코 단순하지 않게 살아온 여덟 명의 엄마 친구들을 취재하는 과정의 내용이다.

여름인 딸과 가을인 엄마와 엄마 친구들, 구순의 할머니의 삶을 보면서 완이는 인생이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다.

비 오는 날은 비를 즐기고, 비 그치면 마당에 나가 풀을 뽑으며 꽃을 가꾸는 일은 나를 가꾸는 일이다. 이순 고개를 넘어보니 이 사소한 일상이 즐거움이고 행복이다. 채송화 꽃 피고 지는 시간처럼 그렇게 이 여름도 내 여름도 다 지나겠다.

지나갔다는 말이 가슴에 서늘하게 들어온다. 그녀와 커피라도 나누며 아쉬움을 달래야겠다. 구월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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