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선화 꽃물
봉선화 꽃물
  • 장민정 시인
  • 승인 2022.08.31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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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장민정 시인
장민정 시인

 

여름방학도 며칠 남지 않은 어느 날 딸아이가 찾아왔다.

“엄마, 봉선화 꽃물 들여요”

핸드백을 뒤적거리더니 약봉지만 한 봉지와 무채색 매니큐어 병 하나를 꺼내놓는다.

내 손을 끌어다 꽃물을 손톱에 얹어 주면서

10분이면 엷게, 30분이면 짙게 드는데 엄마는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다.

`응? 응!'

나는 내 생각에 골똘히 빠져있어 어물쩍 건성 대답이다.

사랑은 물 흐르듯 내리사랑이라고 했다.

사랑도 그렇거니와 사소한 베풂도 어른이 아랫사람에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봉선화 꽃물들이는 것도 그렇다.

주로 할머니나 엄마, 혹은 언니들이 처매주던 통과의례 아니던가?

어쩌다 보니 주객이 전도된 듯 나는 딸 앞에 앉아 손을 내밀고 있다.

내가 해줘야 하는데….

내가 너무 오래 살았나 보다.

매사를 딸은 베풀고 나는 받기만 하는 처지가 되어가니 하는 말이다

물도 사랑도 역류하는 것이 좋을 리 없잖은가? 그런데도 날 생각하는 딸아이의 마음이 헤아려져 뿌듯하고 자랑스럽기도 하니 어물쩡 대답이 건성일 수밖에,

딸아이가 들여주는 봉선화 꽃물,

메아리가 되돌아오듯 나는 사정없이 열 서넛 된 어린 소녀로 고향 집 툇마루에 앉아 있다.

널찍한 마당 한쪽에 남향한 장독대가 햇볕을 받아 평화롭게 반들거리는 여름날, 마중물을 부어가며 펌프질하던 샘 곁에 엄마가 요긴하게 사용하던 큼지막한 확독이 놓여 있었고 이것들을 에워싸듯 분꽃과 채송화 봉선화꽃이 만발하던 할머니의 꽃밭이 있었다.

종일 입 꼭 다물고 있다가 석양 녘이면 활짝 싱싱하게 웃던 새빨간 분꽃, 맨바닥을 기면서도 해맑게 웃기만 하던 채송화며 무성한 잎사귀 사이에 반쯤 숨어서 수줍게 밖을 엿보는 봉선화 꽃들,

그 흔한 꽃들 다 어디로 갔는가?

익숙한 것, 흔한 것은 천대받기 마련인 개성의 시대, 새로운 것만 추구하는 마음 따라 정원의 꽃들마저 오래전에 세대교체가 다 되었다. 내 할머니 정원의 주인공이었던 봉선화며 채송화며 분꽃들을 다시 호명해도 대답이 없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옛 고향은 아니다'는 가곡의 한 구절이 저절로 입가에서 흘러나온다.

내 작고 여린 손톱 위에 봉선화 찧은 것을 얹고 아주까리 잎으로 싸서 명주실로 칭칭 동여매 주던 할머니,

“할머니는 왜 안 해, 내가 해줄까?”

“아니다. 봉선이 넋은 너희들이 기려야지, 할미는 구성없대지”

“나 여기 있어요” “나 여기 있어요”하는 것처럼 간절한 봉선의 거문고 소리는 안타깝게도 맑고 높게 퍼져가는 피리 소리에 묻혀서 끝내 임금님의 귀엔 닿지 못했다지!사랑을 잃은 봉선의 넋이라던가, 선택받지 못한 봉선의 비애, 시름시름 앓다 죽은 그의 무덤가에서 눈물 함뿍 머금은 듯 피어난 꽃이 봉선화임을,

참으로 오랜만에 훌쩍거리던 어린 날의 아련한 슬픔 속에 젖어 본 소중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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