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 받는 날
벌 받는 날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 승인 2022.08.30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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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한낮의 태양이라지만 그다지 뜨겁진 않다. 텃밭 일에 챙 넓은 모자를 챙기지 않아도 된다. 오랜 시간 햇볕을 쐬다 보니 땀이 송골송골 맺히긴 하지만 흘러내리진 않는다. 햇볕이 따갑다 싶으면 그늘 밑으로 잠시 피신을 한다.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이 몸을 에워싼다. 시원하면서 보드라운 어루만짐이다. 이따금 들리는 풍경 소리는 한낮 졸음에 겨운 몽롱함을 깨지 않을 만큼 멀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에 커다란 나무 그늘은 윤슬이고, 텃밭을 팽개치고 캠핑 의자와 한 몸이 된 것에 심술딱지다.

얼굴에 햇빛을 비춘다. 슬그머니 비켜났다 다시 조준한다 싶으면 눈을 질끈 감는다. 한두 번도 아니고 이젠 그러려니, 널브러지고 졸음에 한참 취해있는데 이젠 귓전에 소리가 심술이다. 웬 벌떼 소리? 온갖 날벌레들의 연대공습이다. 넝쿨에 간간이 붙은 커다란 잎 아래 온갖 날벌레들이 붙었다. 말벌에 꿀벌, 등애, 나비며 심지어 나방, 이름을 알 수 없는 날벌레들의 대거 출몰이다.

알이 굵진 않지만 제법 탱글탱글하게 열었다. 기다랗게 넝쿨손이 뻗은 대로 주렁주렁 열매가 열었다. 햇볕을 받은 만큼 달달함의 방출이다. 당연히 날벌레를 불러들일 만한 유혹이다. 손을 내밀어 따 먹을만한 공간이 없다. 심은 건 난데 한 알 따먹을 기회를 안 준다. 한낮이야 그렇다고 하지만 늦은 저녁이 돼서도 빈틈을 주지 않는다. 주야장천으로 달리려나 보다. 포도송이를 에워싼 벌떼들, 언제 이런 걸 먹어보겠는가 싶나 보다.

포기하지 않고 기회를 엿보다 한 알 따서 입으로 총알 배송이다. 엄지와 검지의 섬세한 압력으로 미끄러지듯 껍질에서 분리된 속살이 입안에서 침을 불러모은다. 이런 몹쓸 놈들 같으니라고 이러니 그 난리를 치면서 빈틈을 안 내주었던가?

채울 만큼 배를 채운 것인지, 너무나 단 것에 질린 것인지 벌들과 나비들이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차는 가벼운 입가심인 셔벗인 듯, 그래 봐야 포도 넝쿨 아래 부추꽃이지만, 포도를 맛보게 해주는 배려(?)에 감사할 따름이다.

얼마나 과즙과 알맹이를 먹었는지 하늘을 향해 핀 부추 꽃대가 휘청인다. 그중 나비는 꽃대가 꺾일까 조심스럽게 이차를 즐긴다. 가녀린 빨대를 꽂고, 고요히 앉아 내리쬐는 햇살을 겸해서 즐긴다. 살랑이는 바람에 간혹 날개를 접었다 폈다 하지만 자리를 뜨질 않는다. 사람이 다가가도 쉽사리 자리를 뜨질 않던 날벌레들이 부추 꽃대의 그림자가 길어질 때쯤 귀가를 한다.

이제 온전히 열매와 꽃을 본다. 포도는 뜨거운 태양을 받아 검게 그을렸고, 부추꽃은 하늘의 시린 푸르름을 안았다. 하얗다 못해 시린 빛을 머금은 별자리가 되었다. 거친 비와 거친 햇살을 겪었음에도 속은 시리도록 하얀색으로 수놓은 은하수가 펼쳐진다. 어느 꽃송이 하나 정갈하게 다듬지 않은 꽃이 없고, 어느 포도송이 하나 허투루 채운 것이 없다. 그러니 그렇게 많은 것이 찾아드는 것일 듯하다.

봄이 지날 즈음, 수줍도록 연한 노란색 꽃을 피워서 벌과 날벌레들을 불러들였다. 날벌레들이 떠난 자리에는 열매마저 연한 녹색으로 소심하게 달았다. 그러나 열정은 찾아준 날벌레만큼 많은 열매를 달았다. 그리고 몇 개월의 시간을 뜨거운 태양과 거친 폭우를 겪었다. 대치하기보단 받아들이고, 속으로 멈춤 없이 자신을 만들고 있었다. 바람이 거세면 거셀수록 넝쿨손을 짱짱하게 감았고, 애써 단 열매가 바람에 떨어뜨릴 만도 했지만 모질게 버티면서 알을 더했고 터질듯한 즙을 담았다. 그렇게 애써 만들어낸 자신을 아낌없이 내준다. 모질게 버티고 이겨내며 속이 곪을 만도 한데 너무나 야무지게 여물었다. 그을리고 단단해진 껍질은 여린 나비에게는 쉬 내줄 만큼 주변의 도움을 끌어낸다. 벌을 먼저 불러들인다. 벌 받을까 소심한 난, 날벌레들을 쫓아내지 못했다. 내 먹을 것 하나 남기지 않고 먹을까 봐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았다. 그렇게 많은 것이 에워싸도 내 먹을 건 충분했다. 다 떠난 후 한 알의 포도로 충분했다. 날 것들이 종일 탐한 것보다 내가 더 많은 것을 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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