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날
멋진 날
  • 신은진 한국독서심리상담학회장
  • 승인 2022.08.16 17: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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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램책 그릇에 담은 우리이야기
신은진 한국독서심리상담학회장
신은진 한국독서심리상담학회장

 

북쪽으로 올라간 장마가 다시 내려왔다. 밤사이 폭우 예보에 잠을 설쳤다. 수재 현장 방송을 보며 비 오는 날이 누군가에게 아픈 기억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안 좋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트라우마(trauma; 정신적 외상)라고 한다. 자신이 경험했던 공포와 두려움이 비슷한 상황이 펼쳐질 때마다 재 경험되는 심리적 증상이다. 재난, 재해, 학대 등의 충격적 사건을 경험한 이들이 호소하는 정신적 외상 증상이라 하겠다.

비에 대한 나의 기억은 이러하다. 장마와 관련된 수재 현장은 아니었지만 비 오는 날 기억이 내 무의식에 감정적 정서의 매개체로 존재하면서 나를 슬프게도 하고 외롭게도 했다. 나의 초기 기억은 언제나 비로 시작한다. 비에 대한 첫 기억은 6세쯤이다. 내 기억에 나는 불의를 참지 못하는 당당한 아이였다. 그때 내가 견딜 수 없어 한 것은 어른들의 차별과 편애였다. 나는 시시비비를 따지기 좋아하고 공정하게 대해주기를 주장했다. 그러다 보니 혼나는 날이 많았는데 비가 오던 어느 날, 집 밖으로 쫓겨났다. 비는 그렇게 내 기억에 아픔으로 남게 되었다.

초기 기억은 아들러의 개인심리학 상담기법 중 하나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현재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에 초기 기억의 단서는 심리치료에서 중요하게 본다. 초기 기억에는 경험한 사건뿐만 아니라 개인의 감정이나 생각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많은 기억 중 선택된 초기 기억은 개인의 생활양식을 이해하는 힌트가 된다. 하지만 아들러는 트라우마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현재의 인정욕구를 채우고자 하는 목적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초기 기억도 넓은 의미의 트라우마라고 생각한다. 개인의 자존감에 부정적 영향을 주는 특정 경험과 그에 동반되는 증상들도 트라우마의 범주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수지 작가의 `이렇게 멋진 날(리처드 잭슨 글/이수지 그림·옮김)'의 표지 그림에서 우산을 쓴 소녀는 평안해 보인다. 오히려 비 오는 날을 즐기듯이 우산을 쓰고 장화를 신고 강아지를 따라간다. 비 오는 날을 이렇게 멋진 날이라고 한다. 나가 놀지 못하니 심심한 날이 아니라, 더 신나는 놀이를 찾아낼 수 있는 날이다. 방 안에서의 놀이는 밖으로 이어지고 집 밖으로 들판으로 이어진다. 친구들과 우산을 쓰고 신나게 놀다 보니 파란 하늘이 펼쳐진다. 한바탕 놀고 난 후의 아이들의 표정은 개운하다.

누구는 비가 오면 외출하기 싫다고 하는데, 나는 비가 오면 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개인이 경험한 것에 그 단서가 있다. 아무래도 그 이유가 나의 외로움과 슬픔을 안아주던 비와의 추억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비에 대한 생각이 늘 이렇지는 않았다. 예전에는 비 오는 날이면 우울하고 슬퍼져 무기력해졌다. 외롭고 억울했던 기억이 함께 공존했기 때문이다.

나쁜 기억이 지속해서 떠오르는 것은 대상에 대한 증오감과 더불어 자신의 무기력함을 향하는 심적 고통을 유발한다. 심한 경우 부정하거나 회피하면서 자신을 보호하려고 한다. 기억 폭력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도 보았다. 마음을 표현하라는 것만 듣고 전문가가 아닌 이에게 개방하다가 더 상처받는 이도 보았다.

나는 비 오는 날의 기억을 늘 마음에 품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깨달았다. 내가 그날 경험한 것이 꼭 불행했던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화나고 억울하고 무섭고 슬펐지만, 비 소리가 내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마음의 태풍을 멈추게 했으며 위로해주었다. 바닥에 고인 작은 웅덩이에 나를 비춰보고 발로 물을 튕기고 놀던 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하늘을 더 유심히 바라보며 구름 따라 마음이 흐르기도 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한순간, 기억 속의 그날은 이렇게 멋진 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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