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더운 날에도
아무리 더운 날에도
  • 신미선 수필가
  • 승인 2022.08.15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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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신미선 수필가
신미선 수필가

 

유치원 담벼락 아래 소담스럽게 봉선화가 피었다. 나날이 깊어가는 여름에 굵게 줄기를 키우고 숟가락 같은 둥근 초록 잎을 무성하게 달더니 드디어 꽃을 내보였다.

진한 다홍색 꽃송이 사이사이로 연한 분홍색 꽃잎이 은은하게 조화를 이뤄 모처럼 뜰 안은 화사하니 꽃밭이 되었다.

줄기와 가지 사이에서 꽃이 피고 우뚝하게 일어선 형상이 봉(鳳)의 모습과 비슷하다 해서 `상화라'라고도 하고, 뱀이 싫어하는 냄새가 나서 뱀이 가까이 오지 않는다는 의미로 `금사화'라고도 불린다는 꽃, 순수한 우리말로는 `봉숭아'꽃이다.

옛날부터 부녀자들이 손톱을 물들일 때 많이 사용했고 첫눈이 올 때까지 봉숭아 꽃물이 남아 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옛말도 있다. 나 역시 어렸을 적 옆집 동무들과 마당에 앉아 매끈한 돌멩이 하나 놓고 봉숭아 꽃잎을 빻아 꽃물 들이던 기억이 있다.

봉숭아꽃이 한창인 철이면 오래전에 돌아가신 할머니도 어김없이 소환되는 추억의 한 조각이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장마철이면 잠시 뜸하니 농사일에서 벗어나 낙숫물 떨어지는 처마 끝 툇마루에 앉아 나의 손톱에 꽃물을 들여주셨다.

고사리만 한 작은 손톱에 조심조심 방금 빻은 꽃물을 올려주던 기억, 곱게 잘 물들어야 한다며 비닐을 씌우고 명주실로 묶어주던 추억들이 새록새록 어제인 듯 가깝다.

점심을 먹고 난 후 아이들과 함께 마당으로 산책을 나왔다.

꽃밭을 보더니 한 녀석이 꽃이 예쁘다며 손으로 꽃을 어루만진다. 평소에도 궁금한 것이 많은 다른 한 아이는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으며 이름도 물어본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느끼며 걷고 있는데 맨 뒤에 서서 따라오던 한 아이가 꽃잎을 따서 손톱 위에 올려놓는 것이 보인다.

순간 이 아이에게도 봉숭아 꽃물에 대한 기억이 있을 것 같아서 슬쩍 물었더니 역시나 엄마가 알려줬다며 배시시 웃는다.

한 아이의 작은 몸짓에 아이들과 함께 봉숭아 꽃물 들이기를 해 보기로 했다. 아이들도 저마다 좋다고 손뼉을 쳤다.

이미 꽃밭으로 달려가 꽃잎을 따고 있는 아이도 보이고 꽃물 만들기 좋은 돌멩이를 찾아 나서는 아이도 보였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 짝을 이루고 짝꿍에게 봉숭아 꽃물을 올려주는 그림 같은 풍경 너머, 아이들 머리 위로 여름 햇살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꽃을 사랑하고 자연을 즐길 줄 아는 천진난만한 우리 꼬맹이들은 오늘도 이렇게 꽃 한 송이에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요즘 즐겨보는 텔레비전 드라마에 이런 대사가 있다.

“어린이는 지금 당장 놀아야 한다. 어린이는 지금 당장 건강해야 한다. 어린이는 지금 당장 행복해야 한다”

최근 들어 유아교육과 초등교육 학제 개편안 이슈와 맞닿아 있는 대사처럼 느껴져 마음에 와닿았다.

일찍이 시인 박노해는 그의 시 `부모로서 해 줄 단 세 가지'에서 `내 아이가 자연의 대지를 딛고 동물들과 마음껏 뛰놀고, 맘껏 자라고 맘껏 해 보며 그 속에서 고유한 자기 개성을 찾아갈 수 있도록 자유로운 공기 속에 놓아두는 일이다'라고 읊었다.

부모가, 교사가, 현 교육의 지표를 작성하는 관리자가 이 시를, 드라마 대사를 꼭 염두에 두었으면 싶다.

여름 한나절, 하얗고 투명한 작은 손톱 위에 올려진 소담한 기억 하나가 저마다의 가슴에 즐거운 추억으로 오래 간직되었길 바라며 집으로 돌아가는 녀석들에게 손을 흔든다.

아무리 더운 날에도 아이들은 뛰어놀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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