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잠을 청하며
꽃잠을 청하며
  • 한기연 시인
  • 승인 2022.08.08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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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한기연 시인
한기연 시인

 

바람이 솔솔 불어온다. 귓전에 들려 오는 목소리도 꿈 속인 듯 아득하다. 눈을 뜨려고 해도 뜰 수 없다. 며칠째 잠 못 자서 자몽한 상태에서 숲의 기운이 나를 잠재운다.

여름 내내 특강으로 분주하게 보내고 있다. 방학이 되면 조금 한가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기다렸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 특강 의뢰가 많이 들어 왔고, 욕심부려 거절못하고 수락하다보니 주말까지 하루도 온전히 쉬는 날이 없다. 요즘 인기있는 SUV로 6개월 전에 예약한 차가 도착해서 차박 캠핑을 꿈꾸는 남편에게도 미안했다. 프리랜서니 마음만 먹으면 모든 수업 거절하고 훌훌 떠날 수 있지 않냐고 반문하겠지만 오산이다. 한 번 끊어진 수업은 연결되기가 힘들고, 거절을 당한 강사에게 다시 연락하는 일은 드물다. 그래서 시간을 지혜롭게 활용해 수업계획을 세운다.

지난주 금요일 오후와 토요일 오전으로 연결되는 자투리 시간이 생겼다. 이렇게 예기치 않은 시간이 남을 때는 개인적인 일정을 세운다. 시간이 없어서 함께 하지 못한 남편과 가까운 곳으로 캠핑을 하러 가기로 정했다. 서해안과 동해안 쪽으로 고민하다가 결국은 봉학골에 자리를 폈다. 이른 저녁을 먹는 중에 긴장이 풀려서인지 갑자기 잠이 쏟아졌다. 평상에 얇은 담요를 덮고 누웠다.

몇 년 전에는 갱년기 증상으로 불면증으로 일 년여를 고생했다. 그때 처음으로 잠을 못 자는 고통에 대해 알게 되었다. 평소에 나는 남편 말에 의하면 머리만 대면 자는 편한 사람이란다. 남편은 여행을 좋아하지만 잠자리가 바뀌면 잠을 못 잔다. 그와 달리 나는 잠자는 장소가 어디든 잘 잔다. 그런 터에 겪은 불면증은 상상 이상으로 힘들었다. 다행히 갱년기 증상은 일 년여의 기간에 그쳤지만, 예전처럼 잠을 쉽게 잘 수는 없었다. 나이가 들면 아침 일찍 일어난다더니 그 증상이 내게도 나타났다. 노화의 증후는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우선 안경이 다초점렌즈로 바뀌었지만 가까운 글씨는 안경을 벗고 뚫어져라 쳐다본다. 글씨가 흐리게 보이기도 해서 휴대폰 글씨도 크게 해 놨다. 그뿐만 아니라 선택적으로 문장을 보고 이해하는 일이 잦아졌다. 느슨해진 삶에 촉각을 세우라는 신호일 것이다.

든든한 남편을 수호신으로 세워 둔 산 속에서 단잠을 잤다. 예전에 잠에 대한 우리말 표현을 찾아 본 적이 있다. 수십 가지로 표현되는 잠에 관한 우리말 중에서 깊이 든 잠을 이르는 말로는 굳잠, 귀잠, 꽃잠, 꿀잠, 속잠, 쇠잠, 통잠, 한잠 등이 있다. 그 때 `꽃잠'을 뇌리에 새겨두었다. `꽃잠'은 신랑 신부가 처음으로 자는 잠이라는 뜻이다.

코로나로 일주일을 앓고 바로 휴가로 이어진 큰 아들이 집에 왔다. 인심쓰듯이 신차를 줄 테니 혼자라도 여행을 갔다 오라고 했다. 코로나 휴유증인지 입맛이 없다며 먹는 것도 부실하고 남편과 내가 따로 따로 휴가비를 챙겨 줬는데도 집에만 있다. 며칠 동안 동면하듯 잠을 자는 20대 후반의 아들 모습을 원없이 바라본다.

서울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한다지만 직장 생활이 얼마나 힘들까? 자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애처롭다. 집에서라도 이렇게 잠을 자니 다행이다. 보약 한 재 먹은 것처럼 자고 나면 다시 힘차게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아들의 지갑을 열어보니 용돈이 두둑하고, 다른 한 칸에는 몇 년 전 서울 올라갔을 때 내가 써 준 포스트잇 메모가 들어 있다. `항상 너를 응원하고, 니 뒤에는 가족이 있다.'는 내용이다. 힘들 때마다 위로 받으며 버티고 있을 생각에 울컥 한다.

늦은 밤, 저수지 길을 내려오는 밤 하늘이 별빛으로 반짝인다. 언제든 가족이라는 품안에서 꽃잠을 자고 갈 수 있는 은신처가 되어 줄 수 있고, 기댈 수 있다는 안도감이 어두운 길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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