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 깨닫지 않으실까
무언가 깨닫지 않으실까
  • 반지아 수필가(괴산 청안초 행정실장)
  • 승인 2022.08.07 18: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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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반지아 수필가
반지아 수필가

아이가 아파서 함께 집에 있던 날 심심해하는 아이를 위해 같이 무얼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바로 강낭콩 심기 키트였다.

강낭콩을 몇 시간 물에 불리고, 화분에 흙을 담아 심는 동안 아이는 싹이 날것을 기대하며 한껏 흥이 나있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싹이 나면 다행이고 나지 않아도 아이는 금방 잊어버릴 것이기에 몰래 치우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음날, 신기하게도 진짜 싹이 났다.

단 하나의 싹이었지만 고개를 살며시 내민 그 모습이 너무도 신비로웠다. 그날 이후로 강낭콩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컸다.

엄청난 성장 속도를 지켜보며 하루하루 생명의 신비로움에 취해가던 어느 날, 문득 의문이 들었다. 키도 쑥쑥 크고 이파리도 무성해졌는데 왜 꽃은 안 피는 걸까? 꽃이 피고 져야 콩 꼬투리가 열리고 그 안에서 콩이 자라 수확을 할 수 있을 텐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조바심이 들었다.

아무래도 베란다에서 키우다 보니 햇빛도 제대로 못 받고, 바람도 안 불어서 그런가 싶어 유일하게 창문을 열수 있는 곳에 화분을 옮겨놓기도 해봤지만 크게 차도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강낭콩 키우기'라고 검색하자 셀 수도 없이 많은 후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부분의 글에서는 심은 지 한 달 전후로 꽃봉오리가 생겼고, 곧 콩 꼬투리가 주렁주렁 달렸다고 적혀져 있었다. 나도 콩을 심은 지 갓 한 달이 넘어가고 있었고, 물도 꼬박꼬박 잘 주는데 뭐가 문제일까, 한참을 생각해도 도통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휴대폰을 엎어놓고 벌러덩 누워 이런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손만 한 잎사귀만 주렁주렁 달고 있는 강낭콩을 바라보았다.

불 멍도 아닌 강낭콩 멍을 하고 있자니 갑자기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저렇게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싱싱한 초록빛을 뿜어내며 잘 크고 있으니 어련히 때가 되면 꽃봉오리를 맺고 콩 꼬투리도 열릴 텐데 하고 깨달은 것이다.

조금은 평온해진 마음으로 고개를 돌리니 주말 아침을 잠으로 한껏 누리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문득, 지금까지 아이를 키우며 금방 전까지 나를 뒤덮었던 조바심으로 아이를 힘들게 하진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모든 것에는 다 때가 있기에 서두르는 것이 해답이 되지 못하는 것들이 많은데 당장 눈앞의 성과를 위해 무리하게 밀어붙여 온 것은 없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 것이다.

그 후, 차분히 기다린 결과 강낭콩은 많은 꽃봉오리를 맺었고, 대부분의 꽃이 지고 난 후 콩 꼬투리를 선사해 주었다. 콩 꼬투리가 하나 둘 늘어날 때마다 한동안 잠잠했던 조급함이 불쑥불쑥 고개를 들었지만 지긋이 눌러주기를 반복하고 있다. 더불어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이 가까워질수록 점점 늘어가는 이런 말, 저런 말에 마음이 어지러울 때면 집으로 돌아와 바로 강낭콩 화분 앞에 쪼그려 앉아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는 교훈을 다시 되새기곤 한다.

요새 우리 아이들을 두고 세상이 시끄럽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는 사실을 잊은 일부 어른들을 강낭콩 화분 앞으로 초대하고 싶다. 강낭콩 멍을 하다 보면 무언가 깨닫지 않으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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