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린 여름날
시린 여름날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 승인 2022.08.02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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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얼마간 잊고 있었을까?

쉽게 깰 수 없던 덩이의 마지막 겉껍질을 벗고, 함초롬 싹을 펼쳐 올려 꼿꼿하던 잎은 몇 달여 달콤한 경험을 취하고 측 늘어졌다.

그리곤 몇 번의 비를 맞고 며칠의 해를 받으며 창창하던 색을 빼냈다. 그리고 끝내는 뭉그러진 잎을 온갖 벌레에게 내어 주었다.

아마 6월 초순 정도였을 것이다. 세상에 나와 공기와 바람과 햇살과 함께한 시간의 궤적을 말끔하게 정리한 날이. 그리고 두 달여 시간이 지났다.

이맘때쯤일 텐데 입을 열려던 순간 말쑥하게 순을 올렸다.

꽃을 보호하고 있는 대공은 잎을 올릴 때처럼 다소곳하다. 그리고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녹색 얇은 한지 고깔을 뒤집어쓰고 머쓱하게 솟구쳐 올리고 있다.

길쭉하게 뽑아내며 호리호리한 자태를 맘껏 뽐낸다. 예측할 수 없이 요란스럽게 땅을 두드리며 생채기를 내던 장마가 물러감에 환희의 미소를 머금은 듯하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지루하던 기다림 끝에 개선장군이나 된 듯, 온천하에 알리듯 나팔을 사방으로 뻗친다. 그리곤 몇 개 안 되는 축포도 날린다. 그마저도 수줍고 가녀린 빛깔이다. 시린 속살이 비친다. 요란하게 소리를 내진 않았다. 대신 밤새워 지새우는 풀벌레 소리와 화성을 잇는 매미 소리만이 때가 바뀌었음에 함께 한다.

밤이 되어서도 꽃잎을 오므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말쑥하게 올린 꽃대는, 보슬보슬 내리는 빗물에 온몸을 맡겼다.

오롯이 서서, 가로등 아래 비치는 빗줄기 사이를 나는 벌레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나는 풀벌레 소리에 묻힌다. 가끔은 무엇이 허전한 듯 아쉬운 듯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긴다. 같이 밤을 지새우는 야래 향이 달달한 향으로 추파를 날린다.

그러든 말든 꽃잎은 꽃술은 하늘을 닿는다. 감나무 밑, 분홍상사화의 여름날이다.

온통 가시밭인데, 어인 일로 가녀린 꽃대가 삐죽삐죽 올라왔다. 진녹색의 손바닥만 한 선인장 사이에 노란 꽃이 아닌 강렬한 붉은 꽃이 올랐다. 선인장의 돌연변이가 생긴 것도 아닌데, 가시에 찔린 것인가?

꽃이 피면서 피에 물들인 것인가 싶을 정도의 선홍빛이다. 심은 자리에서 제법 거리가 있는 곳에 꽃이 무더기로 피었다. 꽃씨가 있어 날아간 것도 아닌데, 제자리가 분명 아닌데, 선인장 아래로 돋아난 잎을 보지 못했다.

봐주는 이 없이 여러 날을 조용히 보냈을 터인데, 긴긴 시간을 이겨내고, 쨍쨍하게 내리쬐는 햇살을 맞으러 당당하게 꽃대를 올렸다. 꽃잎은 넓지 않으나 쭉 뻗어 올린 기세가 하늘에 닿을 만하고, 꽃술도 보좌하듯 파죽지세다. 절대로 꽃잎만 피었기로서니 외로울 리 없다는, 송곳 같은 가시보다 강렬한 꽃무릇의 여름날이다.

밤새 그칠 줄 모르던 보슬비는 대공을 타고 뿌리로 흐른다. 대공을 타고 내린 물줄기는 온전히 빗물일지는 모르겠으나 알뿌리 주변은 흥건하다. 알뿌리는 잎이 있었던 흔적을 완전히 없애진 않았다. 대공을 타고 흐르는 빗물은 꽃잎에서 흐른 눈물이 된 듯 잎이 있던 자리에 머문다. 천추에 제대로 환영받고 인정받은 적 없다. 만남을 기약하는 그리움을 가진 적도 없다. 단지 잎사귀를 돋웠고, 꽃잎을 피웠다. 밤을 지새웠고 분주한 새들의 날갯짓과 정신 사나울 정도의 지저귐 속에서 아침을 맞았다. 그리고 조용히 궤적을 지웠다. 언 땅을 제일 먼저 뚫고 올라와 몇 번의 여름을 더 맞았다. 흙 속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만남은 결실을 보았다.

바람에 일렁이는 잎사귀와 꽃잎은 켜켜이 쌓여 알뿌리가 되었고, 숫자는 더할 나위 없이 많아져, 어디서 삐죽 나올지 알 수 없다. 시린 여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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