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이면지
인생 이면지
  • 이은일 수필가
  • 승인 2022.07.26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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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은일 수필가
이은일 수필가

 

요즘 난 하고 싶은 일이 참 많다. 어떤 사람들은 자식들이 다 커서 품을 떠나고 나면 빈둥지증후군으로 우울증이 온다는데, 나는 마음이 홀가분하고 이제야 진짜 내 인생을 사는 것 같은 기분이다. 물 만난 고기처럼 마냥 신나고 하루하루가 새로워 시간이 흘러가는 게 아쉬울 정도다. 가보고 싶었던 곳을 찾아다닌다거나 배우고 싶은 게 있으면 배워 보기도 하면서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나씩 경험해보는 중이다.

그중 한 가지가 책을 읽고 거기서 알게 된 것을 작게라도 몸소 실천해 보자는 것이다. 지난번에는 `옷장에서 나온 인문학'을 읽고 나서 독서 모임 회원들끼리 서로 쓰지 않는 물건을 가져와 필요한 사람과 나누는 작은 장터를 열었었다. 한정된 자원을 아끼고 이미 만들어진 물건은 잘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배웠기 때문이다. 나는 안 쓰고 쌓아 두고만 있던 반찬 용기와 새 그릇들을 내놓고 얇은 조끼를 가져와 운동 나갈 때 요긴하게 잘 입고 있다.

물건이 너무 흔해서 너무 쉽게 버리는 신세대들을 보면 예전에 아끼며 살던 시절이 실제로 있었는지 가끔 실감이 안 날 때가 있다. 남편도 나도 식구 많은 집에서 자라며 근검절약이 몸에 배서 그런지 삼 남매를 키우면서도 항상 검소한 생활을 가르쳤던 것 같다. 아끼고, 나눠 쓰고, 물려 쓰고, 쓸 수 있는데 그냥 버리는 법이 없었다. 이면지를 활용하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었다. 언젠가 컴퓨터 사무용 기기 가게를 하는 지인에게서 이면지를 왕창 받아 와 아이들이 커가는 내내 잘 썼다. 프린터 성능을 시험했던 A4 복사용지였는데 한 면이 전부 영어알파벳 `E'자로 채워져 있었다.

작은딸 집에 갔을 때 메모할 종이를 찾다가 그 이면지에 관한 몰랐던 얘기를 듣게 되었다. 작은딸이 중학교에 들어가서 하루는 종례 시간에 담임 선생님이 “우리 반에 재활용을 아주 잘 실천하는 학생이 있어요.”라며 딸의 이름을 부르더랬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게 이면지인 줄도 모르고 과제를 작성해서 제출했었다는 것이다. 미리 알았다면 새 용지에 과제를 했을 텐데, 딸은 그때 선생님의 칭찬에 속으로 무척 민망했었다고 했다.

늘 써왔던 종이라 이면지를 공책의 줄처럼 그냥 무늬가 있는 종이라고만 생각했었다는 딸의 말을 듣고, 내가 너무 절약하며 아이들을 키웠나 싶어 살짝 미안한 마음도 들었었다. 그러면서 문득 그 이면지가 어쩐지 지나온 내 인생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빼곡하게 찍혀있던 `E'자가 마치 성능검사라도 받는 듯 기계처럼 달려온 내 발자국같이 느껴져 애처롭기도 하고, 인생 이면에 뭐가 더 있는지 한눈팔 겨를조차 없이 앞에 놓인 역할에만 몰두해온 반쪽짜리 삶 같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껏 부지런히 달려왔기 때문에 지금이 있다는 걸 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서 지금의 인생 이면지를 마련할 수 있었던 거니까.

가끔은 지저분한 발자국이 신경 쓰일 때도 있지만, 몸에 밴 근검절약 정신 때문인지 지금껏 살아온 내 삶의 이면지를 버리고 새 종이를 찾고 싶지는 않다. 아니, 사실은 내 흔적이 고스란히 찍힌 이면지라 두려움 없이 뭐든 그리고 쓸 수 있는 것 같아서 오히려 더 좋다. 끝내 풀지 못할 어려운 문제라 하더라도 과감히 도전해 볼 용기도 생긴다. 내 앞에는 삶의 이면지가 충분히 쌓여 있고, 나는 이제 역할 속에 갇힌 내가 아니라 `본연의 나'에 집중하면서 그 여백을 남김없이 잘 활용해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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