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한 날
취한 날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 승인 2022.07.19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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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인기척에 놀란 개구리가 못으로 뛰어든다. 얼룩덜룩 어른 주먹만 한 덩치가 물속으로 곤두박질이다. 물 위를 빈틈없이 채운 개구리밥이 신속하게 자리를 연다. 덩달아 주변 작은 개구리들은 개구리밥에서 자리를 뜨고, 물 밖 소식이 궁금했던 자라는 황급히 몸을 물속으로 담근다. 별안간의 사건에 물결이 일고, 미련스럽게 매달려 있는 연꽃 받침이 소임을 다하고 못으로 떨어진다.

시간이 한낮으로 옮기는 사이, 새하얀 연꽃은 늦잠을 털어버린다. 그리곤 브런치를 단출하지만 화려하게 차려 놓는다. 따가운 햇볕에 그늘 가림막은 흰색의 비단이다. 일정한 간격으로 촘촘하게 겹쳐 곧추세웠다. 부드러운 햇살이 가득한 방이 되었다. 테이블은 연한 녹색의 꽃턱이다. 개구리 알을 박아놓은 듯 정성스러운 조각으로 장식했다. 그리고 둘레에 무수히 많은 꽃술을 달았다. 잘 차려진 공간에 벌떼같이 손님이 찾아든다. 아니 벌떼다. 윙윙거리며 찾아들고 꽃술 사이에 몸을 처박고 헤어나질 못한다. 꽃술 반, 벌떼 반이다.

얼마나 맛난 음식이길래? 벌에 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잠시 잊고, 코를 들이댄다. 그리곤 헤어나질 못한다. 꽃술에 처박혔던 벌들은 머리 위 주변을 맴돌고, 냄새만 맡으려던 코는 얼굴을 끌어들였다. 연꽃 안에 얼굴이 처박혔다. 찌들고 찌든 얼굴 전체에 향 테라피다.

간간이 연꽃을 두고 벌과 줄다리기를 하던 시간은 어느덧 늦은 오후가 되었다. 꽃술 안에서 미처 헤어나오지 못하던 벌이 아쉬운 듯 자리를 뜨고, 연꽃은 꽃잎을 다소곳하게 오므린다. 앞으로도 며칠 동안은 열었다가 닫는 수고로움을 더 할 것이기에 여유롭게 하루의 일과를 정리한다. 그 옆의 연꽃은 벌들과 즐거운 향연을 즐길 대로 즐겼는지, 꽃턱 아래로 꽃술을 가지런하게 쓸어내렸다. 꽃턱의 크기와 꽃술의 양을 보니 제법 컸던 연꽃이었을 것이다. 몇 번을 여닫았는지 지금은 꽃턱만이 남은 것도 제법 있다. 평평한 꽃턱에는 꽃턱의 녹색보다 더 연한 색의 씨앗이 박혀 있다. 이제 향연을 끝으로 씨앗을 영글게 하는 수고로움을 갖는다.

한겨울 진흙탕 속에서 뿌리로 견뎌오고, 봄이 와서도 쉽사리 싹을 올리지 않았다. 연한 순을 조심스럽게 올리고, 장마가 시작돼서야 잎을 펼쳤다. 그리고 충분히 기다린 뒤에 꽃대를 올리고 연봉을 달았다. 연잎보다 더 높이 기세등등하게 꽃잎을 펼쳤다. 일 년의 시간에 며칠 되지 않는 시간 파란 하늘을 원 없이 보았고 벌들을 원 없이 품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미련은 없다는 듯 마지막 하얀 꽃잎을 떨군다. 이제 폭염과 거센 바람을 견디며 익어갈 것이다. 지난한 시간을 견디며 만들어낸 씨앗은 천 년 뒤에도 싹을 틔울 수 있는 생명이 된다. 그래서 꽃을 피우는 시간보다. 씨앗을 영글게 하는 시간이 더 길다.

백련이 꽃잎을 오므리고 잠을 청하러 가는 시간을 살짝 넘긴 시간, 수련(睡蓮)도 꽃잎을 오므리고 잠을 청한다. 수줍음을 많이 타는 건지, 말 못 할 미련을 두는 건지 꽃대를 높이 세우지도 못하고 연잎에 붙어 있다. 몇 날 며칠을 여닫았던 꽃봉오리 몇 개는 아예 물속으로 들었다. 꽃잎을 떼어내지도 못하고, 기품있는 붉을 색을 과시하기에 더는 기력이 없었는가 보다. 한낮의 해를 먹은 듯 강렬했던 본래의 색은 온데간데없고, 갈변 된 꽃봉오리에 며칠 전 먼저 물속에 든 수련에는 다닥다닥 붙은 물 고둥이 떼로 몰려 식사를 하고 있다. 열매도 맺지 못하는 수련은 어찌 꽃을 피우는 건지? 꽃받침마저 모아 필 때의 모습으로 마무리한다. 꽃을 피우는 것보다 거두어들이는데 진심인 듯하다. 숙일 때를 안다.

화려했던 짧은 시간을 뒤로하고, 저물고 있다. 예측불허 호우 끝에 갠 하늘, 구름이 한층 높다랗게 올랐다. 아직은 먹빛을 머금은 구름에 백련의 샛노란 꽃술과 수련의 붉은 꽃잎 색을 덧칠한 광경이 펼쳐진다. 잠잠히 바라보던 사이 장대한 노을도 색을 잃고, 잠을 청하러 간다. 꽃노을을 품었던 구름은 밤이 돼서도 여전히 하늘을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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