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안거(雨安居)
우안거(雨安居)
  • 이은일 수필가
  • 승인 2022.06.28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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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은일 수필가
이은일 수필가

 

고대하던 단비가 내렸다. 봄 같지 않게 덥던 날씨도 한풀 꺾인 듯하다. 요즘에는 하도 더워서 이른 아침이나 늦은 밤으로 운동을 다녔다. 모처럼 아침 설거지를 끝내고 환한 햇살 아래 집을 나선다. 하늘은 파랗고 불어오는 바람도 선선하다. 여름이 오기도 전에 벌써 가을을 맞이하는 느낌이다. 이러다가 혹시 우리나라에서 뚜렷한 사계절을 볼 수 없게 돼버리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천변 길로 접어드니 달팽이가 길을 가로질러 기어가고 있다. 그동안은 집 속에만 틀어박혀서 목마름을 참고 견뎌내다가 이제야 제 세상을 만난 듯 활개 치는 모습에 내 기분이 다 흐뭇하다. 지렁이도 덩달아 꼬물거리고 전에는 이 길에서 볼 수 없었던 새끼메뚜기까지 보인다. 모르긴 해도 길가 풀 섶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더 많은 생명이 분주하게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 수런대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다. 그래서인가? 나무에 앉아 있어야 할 참새 떼가 풀밭에서 폴짝폴짝 날아다니기도 하고 개망초 꽃대가 휘어지도록 위태롭게 매달려 고개를 요리조리 돌리고 있다. 먹이를 찾고 있나 보다. 어쨌든 활력 넘치는 천변 풍경이 생기 차고도 기분 좋다.

들뜬 기분에 행여라도 어린 생명을 밟게 될까 봐 바닥을 살피며 걷는다. 가다 보니 길 중간이 빗물로 한가득 찼다. 그 웅덩이를 피해 가장자리 풀 섶을 밟고 지나며 뾰족한 등산화 밑창에 벌레라도 밟히면 어쩌나 싶어 저절로 까치발을 들게 된다. 아무래도 내일부턴 운동화를 신고 나와야겠다. 반환점을 돌면서부터는 백여 미터 정도 다리 밑까지 자로 그은 듯 곧은 길이 이어진다. 평소 안 쓰는 근육을 쓰게 되면 건강상 좋다는 얘길 듣고 줄곧 뒷걸음으로 걷곤 하던 구간이다. 그런데 오늘은 계속 바닥을 살피면서 걸어야 하니까 뒤로 걸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언젠가 책에서 읽은 스님들의 `우안거(雨安居)'가 생각난다. 부처님께서 활동하시던 갠지스강 유역에는 3개월간 집중적으로 비가 내리는 기간이 있다고 한다. 그때 무섭게 쏟아지는 많은 비로 인해서 어린 동물들이 다니던 길을 못 찾아 헤매기도 하고 길과 논밭으로 물이 넘쳐서 뒤죽박죽되곤 한단다. 스님들은 그럴 때 나다니다가 잘못해서 파종한 씨앗들을 밟기도 하고 작은 생명을 밟아 해칠 우려도 있으므로 두문불출한다는 것이다. 또 비를 많이 맞으면 건강에도 좋지 않아 외출을 삼가고 실내에서 지내면서 미뤄뒀던 일이나 공부, 명상과 마음 수련 등 수행하는 기간으로 삼는다고 한다.

특히 부득이하게 나갈 일이 생기면 아예 맨발로 다녔다는 얘기가 무척 인상 깊었었다.

중년 이후, 남편도 나도 여기저기 몸이 아프기 시작하면서 힘도 예전 같지 않고 어느 날 문득 이렇게 늙는 거구나! 불현듯 깨닫게 된 인생무상에 괜히 서럽고 우울해지는 때가 종종 있다.

준비 없이 맞닥뜨리는 소낙비처럼 온몸으로 고스란히 맞을 수밖에 없는 세월이라는 거대한 빗줄기 속에서, 그냥 이대로 가도 좋은 건지 구메구메 혼란스러운 지금이 어쩌면 서로를 살피고 수행해야 할 우리만의 우안거 기간이 아닐는지 생각하게 된다.

우안거 기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이후 스님들의 도량이 차이나듯이 우리 부부도 이 기간 지혜롭게 잘 보내서 남은 인생을 서로 더 깊이 이해하고, 개인적으로도 성숙해지는 부부로 함께 나이 들어가면 참 좋겠다.

집에 돌아가면 아침에 남편이 먹고 싶다고 한 애호박전부터 부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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