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바람이 불어올 때면
서늘한 바람이 불어올 때면
  • 반지아 괴산 청안초 행정실장(수필가)
  • 승인 2022.06.26 18: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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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반지아 괴산 청안초 행정실장(수필가)
반지아 괴산 청안초 행정실장(수필가)

 

사람은 어느 정도의 고통까지 견딜 수 있는 걸까. 불행을 마주한 이들에게 위로라는 이름으로 쉽게 건네지는 말이 있다. “신은 인간에게 견딜 수 있는 고통만 준다.”하지만 가끔은 정말로 우리에게 닥치는 시련들이 견딜만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언젠가 아이 둘을 혼자서 등원시켜야만 했던 날이 있었다. 집 밖으로만 나오면 질주본능을 발휘하는 둘째는 어김없이 집과 어린이집 사이에 있는 놀이터로 뛰어갔다. “뛰지 마, 뛰지 마”를 반복적으로 말했지만 내심 늘 반복되는 루틴에 말과는 달리 마음을 놓고 있었다. 첫째와 천천히 걸어가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놀이터 울타리 밖 차도로 향하는 둘째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차 한 대도 보였다. 본능적으로 첫째 손을 놓고 둘째에게 뛰어가 팔목을 잡고 인도로 끌었으나 작은 체구의 아이를 보지 못한 운전자는 아이를 치기 직전이었고 내 모습을 보고 급정거를 한 상태였다. 너무 놀라 당장에라도 나에게 욕을 퍼부을 것 같았던 운전자는 내 뒤에서 쭈뼛거리는 첫째를 한번 보더니 “애 간수 제대로 못해요?”라는 말과 비난이 가득 남긴 눈빛을 남기고 가버렸다.

그 당시 우리 아이는 조금 놀라긴 했어도 차와 부딪히지도, 넘어지지도 않아 전혀 다치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의 뇌는 실제 경험을 하지 않아도 그 경험을 하는 상상만으로 신체에 그에 합당한 지시를 내린다고 한다. 이를 뒷받침하듯 나의 뇌 역시 최악의 상황까지 상상의 나래를 뻗쳤기에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당장에라도 주저앉아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처럼 어떤 엄청난 일이 일어날 뻔한 상황에서도 인간은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는데 실제 이런 일을 맞닥트린 당사자들의 고통을 그 누가 쉽게 견딜만한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그 일이 있는지 얼마 되지 않아 티브이 채널을 돌리다`유퀴즈 온 더 블럭'이라는 프로그램 재방송을 보던 중 한 아버지의 가슴 아픈 사연을 듣게 되었다. 27년 전 자신의 아들이 학교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투신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더욱 비통한 것은 아이가 처음 투신했을 때는 자동차에 떨어져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는데 다시 아파트로 걸어 올라가 재 투신을 해 끝내 삶을 등졌다는 사실이었다. 평소 같았으면“참 안됐다”하고 얼마 가지 못해 까맣게 잊었을 테지만, 우리 아들이 큰일을 당할 뻔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는지 한동안 이 사연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자식을 잃은 고통을 `참척의 고통'이라고 한다. `참척'한자의 뜻을 풀이한다면 `참혹한 근심'이다. 이 참혹함을 과연 누가 가늠할 수 있을까.

각각의 인격체가 견딜 수 있는 고통의 크기는 모두 다 다르다. 그러기에 섣부른 위로도 섣부른 단죄도 당사자들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다. 또한 명백한 잘못을 한 어떤 이에게 주어지는 마땅한 비난도 그것을 견디고 있는 그 사람 옆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는 크나큰 고통일 뿐이다. 물론 내가 아끼는 누군가가 자신의 잘못이나 타인의 잘못으로 혹은 자신의 선택이나 타인의 선택으로 인생의 고비를 맞닥트렸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도움을 주고 싶은 건 인간의 선한 본성일 것이다. 하지만 가끔은 아무 판단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옆을 지켜주거나 지금의 우리 자리를 그저 굳건히 서 있어 주는 것이 더 큰 위로가 될 수 있다.

요 며칠 장마가 시작될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려는 듯이 날이 우중충하다. 먹구름이 가득한 흐린 하늘에서 추적추적 비가 내리면 괜스레 마음이 센티해지고 조금 더 나아가면 우울해지기 마련이다.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사람도 그럴 수 있는데, 인생의 폭풍을 겨우겨우 헤치고 있는 사람이라면 오죽할까. 허나, 우리가 모두 알고 있듯이 장마는 언젠가 끝이 날 것이다. 장마가 끝나고 불어올 서늘한 바람에 당신이 고통 속에 흘린 눈물도 서서히 마르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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