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만의 영화, 천만의 말씀
천만의 영화, 천만의 말씀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2.06.14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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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여태 살아오면서 가장 공포의 순간은 `사람'을 만난 일이다.

지금이야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일이지만, 스무 살 청춘에 나는 혼자 몸으로 밤샘 산행에 나섰던 만용의 시절이 있었다. 칠흑 같은, 아니 사방이 절벽 같은 어둠 속을 손전등 불빛 하나에 의지해 겨우겨우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순간은 두려웠지만 `우주가 온통 내 것'이라는 짜릿함도 있었다.

밤새워 산길을 헤매는 동안 걱정했던 산짐승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배낭에 매달아 놓은 종소리 탓인지 산짐승들은 미리미리 몸을 숨긴 듯 했다. 간혹 밤의 평화를 깨뜨리는 나의 침범에 놀라는 야생의 몸짓은 서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악센트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멀리서 흔들리던 불빛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멈춤과 움직임을 반복하는 모습에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그때 나는 처음 알았다. 사람의 눈에서 뿜어나오는 인광이 그 정도로 살벌하고 치열하다는 것을.

천만이 넘는 관객이 몰린 영화 `범죄도시2'를 보며 `사람'이 가장 큰 공포였던, 그리하여 지금도 그 기억을 잊지 못하는 순간이 하릴없이 되살아났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오랜만에 극장을 찾은 나름 `해방'의 순간에 영화는 그만큼 `사람'이, 특히 동족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를 새삼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래서 머리가, 그리고 마음이 아프다.

영화 `범죄도시2'에서 `사람'이 `사람'을 잔혹하게 죽이는 일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오직 `돈'을 목적으로, 나라 밖에서 동족을 살해하는 범죄자에게 그럴듯한 속사정은 발견할 수 없고, 따라서 줄거리에는 서사가 없다.

그럼에도 `범죄도시2'는 천만 관객을 넘긴 23번째 한국영화의 반열에 올랐다. 2022년 1월 기준 국내 인구는 5천 1백만 명이 넘는다. 15세 이상 관람가 등급에도 천만 명이 영화를 봤다는 것은 인구의 20%를 훌쩍 넘는 엄청난 기록이다. 게다가 전체 인구의 20%가 넘는 국민이 내 돈을 내고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극장을 찾았다는 것은 아주 뚜렷한 시대 상황이 담긴 사회적 현상이 분명하다.

영화 `범죄도시2'는 화면 전체에, 상영 시간 대부분이 피가 낭자한 잔인함의 목적은 오로지 `돈'을 위한 것이고, 그 악인의 사고 범위에 복수심이거나 원한의 씻김굿 같은 애달픈 속사정은 없다.

그럼에도 천만이 열중하고 있는 것은 2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갇히고 멀리하며, 또 금지와 차단의 굴레에서 신음했던 울분의 응어리를 풀어내고자 하는 폭력의 카타르시스를 향한 위험한 작동이 사회적으로 선연한 것과 다름없다.

물론 영화 `범죄도시2'에는 초인적인 해결사가 있어, 이국땅에서 무지막지하게 동족을 살해하는 악의 무리를 응징하는 권선징악의 후련함이 관객들에게 기꺼이 관람료와 시간을 투자하게 하는 대표적 이유로 작용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돈'이 아니면 아무런 목적이 없이 선혈이 낭자한 잔인함을 마다하지 않는 영화적 상상력은 선명하게 드러나는 폭력에 비해 극심하고 견고한 빈부격차의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각성의 기회를 애석하게 외면한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폭력과 더 큰 폭력, 그리고 없음과 더 없음이 서로 동족만을 노리는 잔혹을 만들어 낼 뿐이다. 도덕적이지 못할 것으로 짐작되는 사채시장에 대한 범죄적 겨냥은 희미하고, 철부지 없는 그 아들의 살해와 복수의 폭력적 접근은 무모하다.

세상사 뜻과 같지 않아서 악랄한 범죄와 잔인한 폭력에 대응하는 철저한 맨몸의 파괴적 정의 구현이 이 억눌리고 답답한 세상에 모처럼 간담 서늘한, 그저 `영화는 영화일 뿐'으로 위로받을 수도 있겠다.

길었던 코로나19의 억압에서 그나마 극장을 갈 수 있다는 것. 그리하여 천만의 관객이 호응하고 있음은 다행이다. 그러나 폭력으로 악의 무리를 처단하는 맨몸의 히어로에게 열광하는 사회적 현상은 단순하지 않다. 천만 명이 영화를 보았다는 것은 가슴 속까지 시원한 청량제와 해방구가 절실하다는 사회적 언어의 불행한 표현이다. 폭력 대신 평화의 세상을 희망하는. 혼자라도 외롭거나 무섭지 않은 세상은 얼마나 간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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