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김치
어머니와 김치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22.06.14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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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김경순 수필가
김경순 수필가

 

절집 밥상도 이보다 못하진 않을 것이다. 보리밥 반 그릇에 반찬이라고는 김치뿐이었다. 어머니의 밥상은 늘 초라했지만 어쩌면 그것도 감사하게 여겨야 한다고 어머니는 말씀 하실지도 모르겠다. 가난한 살림살이 때문이었는지 어린 시절 우리 집 밥상에는 고기가 올라온 때는 거의 없었다. 고기가 상에 올라온 날은 제삿날이거나 아버지 생신 날 뿐이었다. 제삿날에 오르는 고기도 조기 한가지였다. 닭고기도 산적도 올리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어머니는 아버지 생신 때면 동태탕을 끓여 주셨다. 어머니는 비린 것은 입에도 대지 못하셨던 분이었지만 그나마 동태 탕은 드시곤 했다. 남들은 소고기 미역국이나 닭고기 미역국 그것도 아니면 조개미역국이라도 끓여 낸다고 하지만 우리 집은 누구의 생일이건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미역국이었다. 들기름에 달달 볶아 끓여낸 미역국을 먹으면서도 식구 중 누구 하나 불평을 하지도 않았다.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들 엄마가 해준 잊지 못할 반찬이 있다는데 나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없다. 언제나 일에 쫓겨 사시는 분이니 반찬도 설렁설렁하셨다. 그러니 맛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렇게 어머니의 음식에 길들여져서 그런지 시집을 와서 남편의 식성을 맞추는 것이 정말 곤욕이었다. 친정집과 다르게 시댁은 음식에 조미료를 많이 첨가해서 먹었다. 처음에는 모든 음식이 느끼해 먹을 수가 없었다. 남편은 입맛이 정말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신혼 시절 내가 해준 음식을 달게 먹어 준 적이 없었다. 어쩌면 조미료를 넣지 않는 내 음식이 남편으로서는 먹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남편이 언젠가는 우리 어머니의 김장 김치가 정말 맛있다고 했다.

시집을 온 후로는 시댁에서 김장해 오곤 했는데 그래도 봄이 되면 남편과 나는 친정어머니의 김치를 찾곤 했다. 시댁에서 해온 김장은 조미료를 비롯한 젓갈과 갖은 양념이 들어가 버무린 그 순간부터 먹어도 맛이 있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면 이상하게 개운하거나 깔끔한 맛은 없고 텁텁하고 군내가 나 김치에 손이 가지 않았다. 그와는 다르게 어머니가 하시는 김장은 정말 간단했음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오묘한 맛을 냈다. 소금에 절인 배추에 고춧가루와 마늘 파만 넣고 버무리면 되었다. 버무린 김치는 텃밭에 파 놓은 항아리에 꼭꼭 눌러 담아 삭힌다. 그렇게 별 양념이 들어가지 않은 김치는 봄이 되면 그 진가가 발휘된다. 사이다를 넣은 듯 톡 쏘는 개운한 맛이다.

`소금기를 뺀 무염식, 밥은 한 끼 양의 3/1 정도, 찬으로는 콩 조금과 나물, 솔잎 다진 것, 잣 약간', 30년 전 돌아가신 성철 스님의 밥상이다. 정갈하고 소박하다. 스님은 밥을 먹되, 그 밥에 먹히지 않으려 하셨다고 한다. 그것은 음식에 대한 욕심을 버린 최소한의 생명 유지의 밥이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스님은 생전에 “밥을 먹는 사람”보다 “밥에 먹히는 사람”이 훨씬 많다고 하셨다. 아마도 음식에 대한 현대인들의 과도한 욕심에 대한 우려를 표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면 우리 어머니의 밥상이야말로 어떠한 심욕도 없는 밥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는 고기를 입에도 대지 않은 분이셨지만 구십 가까운 나이로 돌아가셨다. 대부분은 하루 한 끼만 드셨고, 많으면 두 끼를 드셨던 분이다. 나도 어머니의 피를 받아서인지 우리 형제 중 유일하게 고기를 잘 먹지 못한다. 하지만 음식에 대한 욕심은 많아 걱정이다.

성철 스님은 옷은 다 떨어진 것을 입더라도 마음만은 절대 떨어지면 안 된다고 하셨다. 겉치레를 버리지 못하는 나로서는 마음 깊이 새겨 볼 말이건만 그것이 쉽지는 않다. 그래도 어머니의 김치를 거울삼아 마음을 잘 닦아 보려 한다. 간소한 재료로 만든 어머니의 김치가. 세월이 지날수록 오묘한 맛을 내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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