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개울 가에서
비 오는 날 개울 가에서
  •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 승인 2022.06.13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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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 이야기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비는 여름 더위를 식혀 주고 한참 성숙기에 접어든 농작물에 생기를 불어 넣어 주는 고마운 존재이다.

지나치면 홍수가 되고 모자라면 가뭄이 되니, 중용의 덕성이 절실한 게 비이기도 하다.

비가 내리는 날 개울가에 있다면 무슨 생각이 들까?

당(唐)의 시인 육구몽(陸龜蒙)의 시선을 따라 가 보기로 한다.


비 오는 날 개울 가에서(溪思雨中)

雨映前山萬鉤絲(우영전산만구사) 비가 내리니 앞산에 만 가닥 실이 비추고
櫓聲沖破似鳴機(노성충파사명기) 노 젓는 소리가 부서져 베틀이 울리는 소리 같네
無端織得愁成段(무단직득수성단) 누군지 베를 짜 근심이 한 단을 이루니
堪作騷人酒病衣(감작소인주병의) 시인이 술병 났을 때 입을 옷을 만들 만할까?

시인은 비가 내리는 어느 여름날, 마침 개울 가에 있었다.

개울 너머로는 산이 펼쳐져 있었는데, 비의 모습이 마치 끝에 갈고리를 매단 실처럼 보였다.

시인의 눈에 빗줄기는 창문에 드리운 휘장의 갈고리 실이고, 그 휘장 사이로 산의 모습이 흐릿하게 들어왔던 것이리라.

앞산 골짜기를 빠져나온 물은 제법 넓은 개울이 되어 흐르는데, 비가 내리자 지나던 배가 분주해져서 노 젓는 소리가 크고 급해졌다.

시인의 귀에 그 놋소리는 베틀 소리처럼 들렸다.

빗줄기를 휘장의 실로 봤을 때 시인의 뇌리에는 이미 베틀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노 젓는 소리가 쉽게 베틀이 울리는 소리로 둔갑한 것이다.

이왕 베틀이 나온 김에 옷감을 짜지 않을 수 없었는데, 시인은 베틀에 삼베 대신 근심을 집어넣어 옷감을 한 단 짜 냈다.

이젠 근심으로 짠 옷감으로 옷을 만드는 일만 남았다. 그 옷은 다름 아닌 시인이 술이 과해 병이 났을 때 입을 옷이었다.

개울 가에서 비 내리는 모습을 보고 근심을 씻어 내리고 술병을 달랠 옷까지 얻은 시인의 시 역정이 독특하면서도 짜임새가 돋보인다.

여름 비는 반가우면서도 무서운 손님이다.

적당히 와 주고 그친다면이야 최고의 손님일 것이다.

여름 비는 만물을 성장하게 만들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속 근심을 씻어 내기도 한다.

시원한 빗줄기로 짠 옷감으로 옷을 해 입으면 근심을 없애기 위해 마신 술로 인해 생긴 병도 깨끗이 고칠 수 있으리라.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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