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인연
시절인연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22.06.08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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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그녀를 기다린다. 가슴이 뛴다. 다가오는 발자국이 모두 내게 와 멈출 듯, 지나간다. 그렇게 두어 번 나를 지나쳐가고 누가 박꽃같이 환한 얼굴로 걸어온다. 우정이다. 38년이라는 세월의 강을 흘러온 서로를 한눈에 알아본다. 얼마만의 재회인가. 긴 시간을 거슬러 올라 여고생이 된다. 못 알아볼까 봐 한 걱정은 기우였을 뿐 자주 만난 사이로 금방 돌아간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부터 연락이 끊겼다. 어디서 무얼 하는지 알 길이 없던 친구였다. 마음 안에는 늘 남아서 혹시 지나가는 바람결에라도 소식이 들려오면 반가우련만 귀를 열어놓아도 허사였다. 까마득하게 나이를 먹은 지금에 와서 놀라운 일이 벌어진 건 기적이었다.

삼 년 전 어느 날, 울릉도 가는 배 안에서 처음 보는 여인네들의 수다가 시작되었다. 안산에 사는 그녀와 음성에 사는 지인인 둘은 사소한 이야기로 대화를 하게 되었다. 아무 뜻 없이 어디서 왔느냐고 던진 물음이 커다란 파장을 몰고 왔다. 안산의 친구는 음성이라는 고향의 지명이 나오자 반가웠던지라 대화가 길어졌다. 그러다 내 이름이 튀어나온 것이다.

하필이면 그 시간에 그 곳에서 나를 잘 아는 사람끼리 만나게 되고 둘에게서 내가 공통 화제가 되어 이어준 인연이다. 이런 일도 다 있을까. 믿기지 않을 만큼 놀랍다. 꿈을 꾸는 듯, 영화의 한 장면처럼 감동적이다. 이제야 만났다. 오늘, 끊겼던 인연을 다시 잇는다. 자연의 섭리를 따라 흘러들어온 시절인연(時節因緣)이 이런 것인가 보다.

불교용어로 시절인연은 명나라 말기의 승려인 운서주광이 편찬한 선관책진(禪關策進)에 나온다. 인연이 도래하면 자연히 부딪혀 깨져서 소리가 나듯 척척 들어맞으며 곧장 깨어져 나가게 된다는 구절에서 따온 말이라 한다. 불교의 인과응보설에 의하면 아무리 거부해도 때와 인연이 맞으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되어있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된다. 또 애를 써도 만나지 못할 인연은 만나지 못한다는 인연설이다.

오랜만에 만난 둘은 깊은 기억 속에서 옛이야기를 끄집어낸다. 여고 1학년 시절에 펜팔이 유행이었다. 그녀와 나는 서울에 사는 남학생들과 펜팔을 주고받았다. 나는 얼마 가지 않아 연락이 끊겼다. 그녀는 길게 이어져 몇 번의 만남까지 가졌다는 것이다. 어쩌다 소원해지고 멀어진 그를 아득한 세월이 흘러서 찾아 나섰다고 한다. 그만큼 궁금했던 마음이 컸던 것이리라.

얼마 전 기어코 그를 다시 만났다고 했다. 괜히 만났다고 후회를 하고 있었다. 소중히 간직했던 추억이 단번에 사라져 환상이 다 깨졌다고 한다. 그냥 그대로의 좋은 기억으로 남기는 게 나을 뻔했다는 그녀에게서 피천득의 인연을 떠올린다.

열일곱 되던 봄에 만난 아사코를 사랑하게 된 그는 그때의 그녀를 어리고 귀여운 꽃인 스위이트피이를 닮았다고 표현했다. 그리고 두 번째의 만남은 십 년 하고도 삼사 년이 더 지나 만난 모습을 청순하고 세련된 목련꽃에 비유하고 있다. 그 후 또 십여 년이 지나 수소문 끝에 결혼한 그녀를 만났다. 세 번째는 시드는 백합처럼 초라해져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은 아니 만나야 좋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한다.

피천득과 아사코의 인연이 안타깝다. 친구 또한 잊지 못할 풋풋한 시간들이 미련으로 남았을 터이다. 이루어지지 않은 두 사람은 속에 간직한 채로 둘 걸 하는 후회를 남기고 있다. 추억은 추억으로 남을 때 아름답다는 속내를 말해준다. 멀어져간 인연을 억지로 붙잡아 놓으려 한들 곁에 머물지 않는 법이다.

시절인연. 내가 좋아하는 말이다. 오랜 추억을 소환하여 그리움을 불러내는 말. 아련한 설렘이 슬며시 틈을 비집고 나오는 말. 만날 사람은 언젠가 만난다는 인연설이 와 닿는 하루였다. 마음 날씨가 하 수상하다.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안개가 자욱해지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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