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을 읽는 날 - 셋째 날
풀을 읽는 날 - 셋째 날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 승인 2022.06.07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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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가뭄 주의보란다. 아침저녁으로 우물을 길어 주었는데, 텃밭의 푸성귀와 뜰의 잔디는 흙색을 닮아간다. 한 번도 거른 적 없이 물을 주었는데 역부족이었나 보다. 긴긴 가뭄에 우물 길어올리기 고수의 어깨와 허리에 통증이 오기 시작하고, 두레박이 올라오는 속도가 급격하게 느려졌다. 잎이 손바닥만 하고 얼굴만 한 꽃을 피운 수국은, 아침저녁 나절로 물을 주어도 그때뿐이다. 정말 뜨거운 날씨다. 가뭄은 인내력의 한계를 뾰족한 바늘 끝으로 올렸다. 아니다 싶어 수중모터를 우물에 집어넣었다. 막혔던 속이 뚫리듯 시원스럽게 솟구쳐 나온다. 원 없이 물을 준다. 잔디는 수초가 되었고, 물을 워낙 좋아하는 오이는 물바다에 잠겼다. 고추밭에는 헛골에 물을 댄다. 어쭙잖게 물을 주었다가는 가뭄을 더 타고, 뿌리가 연약해질 듯하여 가능한 한 멀찌감치 물을 댄다. 물을 주었으니 찾아가는 수고로움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다.

상추, 쑥갓 등 쌈 채소는 몇 번 따먹지도 않았는데 색이 빠지고 동이 섰다. 하는 수 없이 뽑아내야 하는 상황, 힘없이 손을 놀려 뽑아내는데 더욱 허탈하게 만드는 게 있었다. 쌈 채소 사이 사이에서 초록초록 다부지게 자라고 있는 녀석들이다. 시시하고 하찮게 여겨져 발에 걷어차이는 녀석들이, 공들여 가꾸는 푸성귀 그늘 밑에서 나지막이 자라고 있었다. 당연히 내 배를 채울 녀석의 자리라 생각했던 푸성귀의 자리는 존재감 없이 자라는 풀의 자리였다. 끊임없는 물 주기와 비료를 탐하던 것들과는 달리 자체의 자리를 만들고 있었다.

풀은 이랑에서 자랄 수 없는 천한 것이다. 밭에서 자리를 잡아봐야 고랑이나 두둑 정도가 허락된 장소다. 그마저 웬만큼 자라면 낫이나 예초기에 혹은 제초제에 제거되는 대상이다.

쟁기로 밭을 간다. 이랑의 흙을 뒤집어 고랑에 채운다. 고랑은 이랑이, 이랑은 고랑이 되었다. 그렇다고 고랑에 있던 풀이 이랑에서 자리지는 못한다. 단지 이랑에서 자라는 푸성귀의 거름이 된다. 작물에 양분을 내준 이랑은 지력이 다하였고 풀의 도움을 받는다.

풀에 버러지가 기어간다. 연하고 풍성하게 자라야 할 작물이 별 볼 일 없으니 싱싱한 풀에 붙었다.

강아지 꼬리 흔들 듯한 풀이 꽃을 많이도 달았다. 하늘하늘하며 작물 사이를 비집고 올라왔다. 그 옆으론 바랭이가 이삭을 올렸다. 마늘종 뽑듯 뽑아 입에 물었다. 미심쩍은 마음에 앞니로 자근자근 씹었다. 달짝지근하다. 어릴 적 먼지 풀풀 날리던 뚝방을 거닐다 어금니로 씹던 맛이 소환된다. 쇠비름도 꽃을 피웠다. 채송화인 듯 땅에 바짝 드러누웠다. 일찌감치 쇤 쌈 채소를 뽑던 난 결국 풀 앞에 무릎을 꿇었다. 풀꽃을 보려고 자세를 낮추고, 절대 이기지 못할 풀에 경외감을 보낸다. 선택되지 못한 그러나 가뭄 속에서 걷어차이고 짓이겨져도 포기하지 않고 이 세상의 주인공은 나다. 나도 꽃을 피울 줄 안다고. 포토존에 들어갈 만한 꽃이 아님에도, 이겨내고 버티고 피워낸 꽃이라 대견하다. 숙이기보다는 더 강해지고 세지는 풀이다. 그리고 끝내는 꽃을 피워내는 풀이다.

풀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의 유한함을 아는 듯, 극복하고 연명함에 줄기를 끊임없이 뻗어 뿌리를 내리고, 씨앗을 닿을 수 없을 곳이 어디까지인지 가늠할 수 없는 곳까지 보낸다. 범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가졌다.

비가 왔다고는 하는데 호미 날 끝이 겉에서만 긁적인다. 겉흙만 적신 빗물은 속으로 스며들질 못했다. 워낙 가물었으니, 최악의 가뭄이라고 하니 해갈하는데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한낮에 작물은 또 힘없이 수그러졌다. 그러건 말건 풀은 꼿꼿하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자기 자신의 모습에 정돈되고, 자신에 맞는 능력을 갖췄다. 자신만이 할 수 있는 풀이다. 자존심을 사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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